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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인간학

착한 사람들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중세의 마녀재판을 뒷받침한 것은 착한 사람들이다. 이천 년에 걸친 유대인 박해를 뒷받침한 것도 착한 사람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일본에서 전쟁 반대자에게 "매국노!"라고 욕하고 걷어차며 침을 뱉은 것 역시 착한 사람들이다. 현대사회에서 처한 행위나 성추행에 눈을 번뜩이며, 용의자를 붙잡는 즉시 목을 매달아 매장해 버리는 것도 착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다. 착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건 결코 자기비판을 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는 데 조금의 의문도 품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같은 행동을 하는 데서 한없는 기쁨과 안락함을 느낀다. 다시 말해 착한 사람들의 올바름의 근거는 딱 하나, '모두' 다.

본문 中




'니체의 인간학'이란 이 책은 일본의 칸트 전문가 철학자인 '나카지마 요시미치'가 쓴 니체라는 인간의 철저한 해석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왜 '칸트'가 아니고 '니체'인지, 처음엔 의아했으나 읽다 보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착한 일본인들에게 까칠한 니체의 말을 빌어야 하는 설득력이 필요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가축무리로 표현되는 일본인들을 비웃으며 읽기엔 독자 스스로도 자유롭지 않다. 


이 책은 니체의 철학을 철저히 파헤쳤다기보다 어떤 문제를 지독하게 파고드는 니체의 반역 정신(유대교와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의 기초가 되었던 원인들을 해석을 하는데 상당히 거칠고 재미있다. 

*르상티망: 약자가 강자에 대해 가지는 질투나 시기심


유대교와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하는 동력인 르상티망은 니체 자신이 살아가는 동력이기도 했다.  니체만큼 르상티망이 강한 철학자는 없었다.  그의 인생은 르상티망으로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르상티망을 자세히 이해하고 그 비열함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몸서리칠 정도로 혐오할 수 있었다. 니체의 르상티망은 토마스 만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의 주인공 토니오가 자신의 지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행복하고 단순한 사람들에게 품는 여유로운 르상티망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보다 강하고 현명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남자들에 대한 직선적인 르상티망이었다.  니체는 자신이 그런 선택된 남자 중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니체의 철학을 살펴보면 순종적이고 착하지만 비열하고 약한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 완전한 우리의 모습을 자각할 때, 진정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불평등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며, 평등을 강조하면 모두가 불행해진다고 보았다. 그런 인식을 저자는 착한 가면을 쓴 약한 인간을 혐오하는 것으로 표현됐다.


특히 이 책은 그런 그의 철학 중에서 이러한 '착한 사람들'의 폭력성에 대하여 상세하게 분류된 카테고리라고 보면 맞을 것 같다. 그는 착한 사람들은 '다수'라는 연대로 자기비판적 시각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을 정도로 스스로를 관찰하는 눈이 없다고 보았다. 자기기만에 빠져있고 고지식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가축의 무리와 비슷하다고 표현했다. 예를 들어 지나치게 친절한 일본의 관내 안내방송을 예시하며 착한 사람들의 안전에 대한 강박은 폭력에 가깝다고 폭로하고 있다. 지하철 안내는 승객들을 거의 환자취급하듯 방송한다.


착한 사람은 관리받는 것을 몹시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멍청한 안내 방송이 아무렇지 않다. 거기서 그 어떤 굴욕이나 모욕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고 착한 사람이 둔감한 것은 아니다. 착한 사람은 사회적 강자가 조금이라도 약자의 편을 들지 않는 태도를 보이거나 차별 발언을 접하는 즉시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들의 폭력성이라..

명제 자체가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의 논리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니체에게 착한 사람은 약자와 동일어다. 약자는 자신의 약함을 정당화하고, 약하기 때문에 강자의 보호를 원하며,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으려 먼저 친절을 베푼다고 해석한다. 게다가 약자의 무리는 다수이기에, 강자의 사람들이 당연히 위해주고 이해해줘야 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착한 가면을 쓴 약자들에게 강자들은 지배당하는 꼴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의 니체가 생각하는 착한 사람들의 근본적인 속성 즉, 폭력성이다.


착한 사람들에게 최고의 자리는 강자의 삶이 아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중간과 중위의 것을 최고이자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데, 이는 다수자가 살아가는 장소이자 다수자가 이 장소에서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리 속에서 편안함을 보장받길 원한다. 니체는 약하기 때문에 비열하고 선량할 수밖에 없는 착한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들은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에 착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저자 '나카지마'는 약자가 약자로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문제는 약자가 자신의 유약함과 무력함을 착함으로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저자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요약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선량함 말고는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착한 사람으로 살지 말라고. 자신의 확고한 의지와 행동과 주장만이 삶에 대한 예의라고 말이다. 강자의 삶을 살라고. 독선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지성적이며 스스로의 의지로 책임지는 인생을 살라고 말이다. 안전하게 살지 말라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약하기 때문에 착한 것을 선택하고 굴복했던 지난 삶이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고착화하면서 기대했던 낙수효과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평등을 강조하면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사실도 배웠다. 갈수록 부익부 빈익빈은 벌어져만 갔고 평등과 분배를 외쳐봐야 문을 닫고 경호를 강화하면 그들의 귀에는 모기소리만큼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니체는 동등한 경쟁을 원했지만 자본주의체제는 규모의 경제를 앞세워 아흔아홉 개의 기업이 하나밖에 없는 자들의 물건을 빼앗아 백개를 채우는 실정이다. 약자들의 결말이다. 


약자들이 외친 평등은 애초에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능력이 서로 다른 인간들이 모여있는데, 진정한 평등이 가능 키나 하겠는가. 차라리 불평등을 인정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이성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니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인격적으로, 지성적으로 검증된 극소수의 지배층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이끌어가는 사회였다. 사실 니체가 추구하는 절대질서는 플라톤식 엘리트주의와 유사하다. 즉 강자의 도덕을 바라는 것이 더 빠른 방법이란 것이다.


니체의 인간학을 파헤진 저자는 니체의 말년은 어땠을까. 저자는 글로만 강했던 그의 삶을 담담히 알려준다. 착한 사람을 지독하게 경멸의 시선을 보냈던 니체는 아이러니하게도 대등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남자였다. 그의 최종적 친구였던 바그너도 단념하듯 돌아섰고 니체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절대적인 고독 상태에 빠져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니체는 시대를 앞서간 위험하고도 불행한 철학자였다.




<니체의 인간학 / 나카지마 요시미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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