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었을 때만 깨칠 수 있는,
병이 났을 때만 깨칠 수 있는,
이혼했을 때만 깨칠 수 있는,
배신당했을 때만 깨칠 수 있는 도리가 있습니다.
원효도 해골바가지 물을 마셨다가 토했을 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곳마다 거기에 있어요.
그것을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세세생생 육도를 윤회하며 헤맬 수 있고 단박에 해탈할 수도 있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집안일을 하면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유튜브를 자주 애청한다. 듣다 보면 모든 원인은 본인(자신)에게서 비롯되었으며, 그 깨달음을 통한 변화는 남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스님의 즉문즉설은 상담자의 고민에 따라 대답이 다르다. 그것은 살아온 사람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법륜스님이 왜 부처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깨우치려 힘들게 여러 곳을 다니며 즉문즉설을 하시고 그들의 삶에 관여하실까 의문이 있었다. '법륜스님의 야단법석'이란 책도 읽어봤는데 지구촌 곳곳을 다니시며 말씀하신 대화의 기록을 읽어봐도 그 궁금증이 해갈되지 않았는데 드디어 이 책에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님이 행적의 이유를 밝혀졌다.
스님은 원효대사의 가르침에 크게 감동하신 것이다. 스님은 현대판 원효대사셨다. 법륜스님은 불교의 경전을 읽을 줄 알아야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도 그 근본은 불교의 세계관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원효대사가 무덤가의 해골바가지에 물을 마시고 저녁과 아침의 물이 둘이 아님을 깨우쳤듯이 현상 속에 걸림이 없는 현상이 그대로 실상임을 아신 것이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을 일반인들이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그곳이 바로 절이고 부처의 세상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원효대사의 깨우침의 글은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바로 법륜스님이 우리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 싶은 비유인 셈이다.
자본주의사회에 사는 우리는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욕심의 끝은 한이 없고 종교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연인관계에서마저도 '내 꺼'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쓰고 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지만 조금만 나와 우리의 경계를 벗어나 생각하는 자세가 된다면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뀔 수 있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던 중에 스님이 교회 수련회에 가셔서 불교를 몸으로 경험하게 했던 대목이 있어 소개하려 한다. 불교의 공(空) 사상을 알게 쉽게 전달한 사례다. 스님은 경청하고 있는 한 목사님을 향해 차고 있는 시계는 누구 거냐고 질의를 하셨다. 목사님은 '내 것'이라고 당연히 말씀하셨다.
왜 당신 것이냐고 계속 반문하자 많은 사람들이 실없는 스님이라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자 어느 목사님이 '아, 우리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 것입니다.'라고 큰 깨달음을 얻은 양 소리쳤다고 한다. 하지만 스님은 '왜 하느님 것이냐'라고 또 반문하셨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의 '허상'이 얼마나 크고 두터운지 알게 한 사례였다. (아래 인용문 참조)
'내 것이구나', '네 것이구나', '하나님 것이구나' 하고 아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구나'하는 순간 모든 번뇌가 사라집니다.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그대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진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허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쓰고 있는 줄도 몰랐던 색안경을 적어도 한 번은 벗어봐야 해요. 도로 끼고 살더라도 한 번은 벗어봐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자기가 얼마나 꿈속에서 헤매는지 몰라요. 꿈을 꾸고 살더라도 꿈인 줄은 알아야 해요. 연극을 보면서 울고불고하더라도 진짜가 아니라 연기인 줄 알고 울어야 해요. 우리는 인생을 마냥 뜬구름처럼 삽니다. 꿈속에서 헤매듯이 몽롱하게 살아요. 그러니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매일 죽느니 사느니 아우성을 치지요.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투영된 영상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왜 삶에서 필요할까. 실제의 세계로 믿게 되면 그것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인식은 욕심으로 변하게 되고 얻지 못하게 되면 제일 먼저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유리방음벽에 수많은 새들이 부딪쳐 죽는 사례가 있었다. 알고 보니 새들은 유리창 너머 보이는 하늘이 실제인양 지나가려다 부딪쳐 죽은 것이다. 그 뒤로 유리방음벽에 새들의 그림이 그려놓았더니 방음벽 쪽으로 날아오지 않았다.
인간이 유리에 비친 영상을 실제라고 믿는 새들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현상이 공(空)이라 생각하고 상대방의 인식도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싸울 일도 상처받을 일도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관계 속에 있어야 안심을 하지만 또 그 관계성 때문에 힘들어 도망치기도 한다. 무한반복이다.
스님은 말씀하신다.
따로 수행도량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내 삶터가 그대로 수행도량이고 나에게 순간순간 일어나는 이 모든 시비분별심이 수행과제라고 말이다.
<지금 여기 깨어있기 / 법륜스님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