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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에 관하여

더 이상 미룰 문제가 아니다



백신 접종 프로그램이 최상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접종 여부와 방법을 비롯해 여타 의학적 결정을 오로지 나이만으로 내릴 수는 없다는 기본 전제가 바탕에 깔려야 한다. 다시 말해, 개개인의 건강 상태와 신체 기능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소리다. 건강한 80세는 겹겹의 지병으로 쇠약해진 70세보다 오래 산다. 즉, 현대인의 대다수는 언젠가는 면역계가 지쳐 버린 탓에 매년 맞던 독감백신이 소용없어지거나 백신 접종 따위 이 나이 먹어 부질없다고 느껴지는 지점에 이를 것이다.

노년기에는 인체의 다양성이 정점을 찍는다. 성인에서 노인으로 넘어가는 기준 나이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노화의 속도와 폭 역시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노인의학계에 도는 말이 있다.

- 본문 中



의욕과는 달리 이제야 책장을 덮었다. 유명 독서인이 추천하는 도서였고 넉넉한 시간을 갖은 여유로 800쪽이 넘는 도서랄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노령을 다룬 주제의 무거운 의미 탓이었을까.. 너무 반복되는 제시들은 지루함을 이기진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책임엔 분명하다. 혹시 나 같은 사람이 있다면 책을 분할해서 시도하시길..


한국은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을 했다. 저출산. 고령화로 이어지는 사회가 지속되는 현실을 반영했을 때, 해가 갈수록 노령인구비율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노인의학에 대한 집중적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시급하다는 것은 수순일 것이다.


집안에서 고령의 가족으로 인해 다급한 상황을 겪어본 사람들만이 닥친 후에야 노인의학의 부실이 눈에 들어온다면 이미 때는 늦은 후다. 현재의 노인들의 사회적 대우는 '투명인간'급이다. 저자는 노인의학 전문의로 보건인문학 및 사회적 프로그램의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통합의학센터에서 성공적인 연구를 이끌었고, 책에서도 밝히듯이 나이 듦을 제정의 할 필요를 느꼈다고 한다.


우리는 보통 삶의 단계를 구분할 때, 유년기(0살~20살) - 성년기(20살~60살) - 노년기(60살 이상)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생의 단계 기준을 간단히 보더라도 노년기는 인생에서 가장 긴 구간에 해당된다. 이제는 100세 시대라는 말이 흔치 않게 받아드려 지는 것을 생각해도 길어진 노년기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할 이슈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노년기에는 같은 나이라도 사람에 따라 건강상태와 기능 수준이 천차만별 다르다고 말한다. (위 인용문 참조) 그와 같은 차이의 원인은 삶의 질, 활동 수준, 생활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그녀는 현재 노인의학에서 구분되는 단계는 다시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년기부터는 이제, 젊은 노인 - 노인 - 고령노인 - 초고령노인으로 구분해야 하며 그에 걸맞은 대처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평소 잘 관리되던 만성질환이 노년기 막판에 악화돼 보통 2~4년 심하게 앓다가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이 마지막 투병 기간에 그들에게 의지가 될 만한 제도적 장치는 여전히 미비한 실정이란 점이다. 의료계에서 통하는 발언이 씁쓸한데, 현재의 의료 시스템 아래에서는 양로원에서 외로운 말년을 보내지 않으려면 딸이 셋은 있어야 한단다.


또 저자는 의학계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의료행위에 대한 고발도 서슴지 않는다. 의대에 입학해서 레지던트를 거쳐 직책을 맡아 부서에 발령이 되기까지 목도된 의료계의 현실 고발들은 그동안 우리(환자였거나 보호자시절)가 의심스러웠던 의료행위들에 대한 확인 같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실태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란 사실이 문제란 거다. 또한 의료처방의 실수 또한 심각하다고 말한다. 고령환자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그때 보이는 단편적 시각으로 시술하는 방식은 복합적 문제를 다시금 키운다는 점이다. (아래 인용문 참조)


연차가 높아질수록 의사들의 공감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느 의료 집단이나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연구 결과가 많다. 의사들이 건강한 적응이라 믿는 것은 실은 악질 문화변용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런 문화에 완전히 동화된 의사는 환자를 더 이상 인격체로 보지 않고 기껏해야 업무의 연장선 혹은 걸림돌이나 골칫거리로만 인식한다. 한 직업군 안에서 적지 않은 구성원이 일 때문에 타자의 기본 인간성 침해에 무감각해진다면 그 직업 문화는 전체적으로 병든 것이다.



사회적으로 드러난 의료사고 외에도 노인 의료처방에 있어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는 의사의 참회록은 셀 수없이 많다. 바로든 나중이든 후회할 일을 본인이 직접 저질렀다거나 다른 의사가 방조 또는 동조함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러한 암묵적 폭력의 문화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구축되고 강화된다고 우려한다. 그런 가운데 우리 모두 다양한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노인의료를 어떻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그는 '돌보는 의료'를 요구한다. 환자와 질병을 따로 떼어 취급하는 의료계의 습관을 고치고 환자들의 권익과 건강을 최대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초심을 요구하고 있다. 이 책은 개인, 사회, 질병본부, 국가 모두가 무겁게 받아 들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어느 한 세대의 편의로 보지 말고 누구나 나이 든다는 시각으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돌보는 의료'에 대한 판단과 사고는 단순히 늙어 가는 신체의 껍데기에 주목하라는 말이 아니다. 읽으면서 30년 가까이 함께하다 돌아가신 시어머님의 슬퍼하던 외침이 문득 떠올랐다. 시어머님이 푸념처럼 늘 반복했던 말씀의 요지는 "나는 젊었을 적 그대로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데, 몸뚱이가 말을 안 들어 슬프다"셨다. 노인정에서 만나는 친구분들도 한결같은 얘기를 한다며 삶의 회의를 내비치셨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노년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혼란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족과 사회는 늙어가는 껍데기에만 주목하는 세태를 무기력하게 웅얼거리며 혼자서 감내해야 했던 고독감과 그들에게 반박할 수 없는 쇠약 해져 가는 몸의 혼란스러움(비교할 근거가 자신의 젊은 시절 밖에 없을 테니)이 아니었을까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에 뒤지지 않는 비중으로 역사, 문화, 철학, 인류학, 사회학, 작가의 스토리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노년에 대해 집중적인 고민을 얘기하고 있다. 그 의도는 우리가 결국 희망은 과학뿐이라는 맹신적 사상에 매몰되지 않았으면 하는 강조였을 것이다. 노인에 대해 단편적인 지식은 마치 인생은 젊어서 죽거나 나이가 드는 것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만 제공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노인이 된 부모세대들이 힘든 것은 무엇보다 늙어 가는 것을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힘껏 거부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러니 노년기의 장점을 볼 짬이 없는 것이다. 나이 들어서는 가정과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줄고 편안한 여유에 대한 만족감, 삶의 지혜, 결정권이 늘어나는 데도 말이다. 현대인들은 너무 여유가 없다. 늙고 있다는 것을 불안해한다. 늙으면 가파른 내리막으로 떠밀려 곧 잊힐 운명이라는 것에 조급해한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인간의 노후는 개개인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유전자와 당시의 시대상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엄밀히는 지금 나이가 많다는 것 자체를 잘 늙고 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누구나 나이 들어갈 것이다. 누구나 행복한 노년의 삶을 꿈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 양쪽의 노력과 개선이 치우치지 않고 똑같이 진행돼야 한다. 이젠 더 미룰 시간도 없다.




<나이 듦에 관하여 / 루이스 애런슨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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