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낼 이유도 속상할 일도 없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 기형도
소중했던 것들을 잃고 시를 쓰는 마음은 얼마나 찢어질까..
경험하지 않고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름답게만 읽혔던 과거의 시가 이제는 통증과 함께 다가온다.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오고, 막막하고 허전한 공백을 메꿀 수 없어 허둥대는 내 모습이 처량하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들은 기억 저 편으로 건너갈 것이다.
마음을 고쳐먹고 어제 친정아버지를 뵙고 왔다.
착한 자식들만 괴롭히는 아버지가 떼어 버리고 싶을 만큼 미워서 안 갈 거라고 외쳤지만 이 감정이 오기라는 사실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올케는 한동안 들리지 않은 내게 서운한 표정이 역력했다. 시아버지의 족쇄에 갇힌 것에 대한 억울함이란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각오를 했어도 현실의 고통은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을. 죽음에 순서가 정해져 있다면 삶이 얼마나 계산하기 쉽겠나. 친정엄마는 삶에 예외사항이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셨다.
아기가 되신 아버지를 어른으로 바라보니 그동안 고통스러웠다. 아기 대하듯 용돈을 주고 옷을 사드리고 달콤한 음료를 입에 대드리니 밝아지신다. 안심을 하지만 이 모습도 변덕스러운 아기로 돌변하기 전까지 만이다. 내가 알고 그리던 아버지는 이미 엄마와 함께 떠나신 지도 모른다. 우리는 빈집에 있는 유아기 때의 아버지만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화낼 일도 속상할 일도 없다.
돌아오는 길, 엄마에게 안부를 물었다.
"엄마, 거긴 괜찮아. 아버지가 아기가 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