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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에 대한 고찰

차라리 숙명이라고 생각해 보자

여자들이 시어머니와 잘 지내는 데 정해진 방법도, 정답도, 모범 답안도 실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남편을 몰아붙인다고 해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럴 리도 없겠지만 남편이 못된 시어머니 대신 나를 선택한다고 해서, 그 시어머니란 존재가 사라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처음 며칠이야 통쾌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못된 며느리'가 되었다는 생각에 더욱 괴롭고 밤마다 끙끙 앓으며 어머니를 걱정하는 남편의 모습도 한동안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 어느 쪽도 편안해질 수는 없다. 결코.


'내 남자의 그 여자'의 본문 中  




나는 시어머니와 30십여 년을 함께 살았었고 어머니가 영면하신 지는 5년이 지났다. 친정엄마와 아버지는 서로 의견차가 커서 정말 너무 싸움을 심하게 하셨고 나는 탈출구가 오직 결혼 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른 나이지만 서둘러 결혼을 했다. 시어머니가 결혼당시에 '딸같이 생각할 테니 너도 엄마로 생각해 다오'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똑같은 산업전선을 달리며 맞벌이를 해도 남편은 평생직장이고 나는 언제고 때려치울 수 있는 구멍가게로 아셨다. 딸 같은 며느리라 말씀하신 게 무색하게 내가 파김치가 되어 퇴근을 해도 저녁쌀 하나 씻어놓지 않으셨다. 힘들다는 표현을 하면 당신 몸이 아픈 사연을(자식들을 키웠던 고생담) 곱절로 풀어놓으셔서 입을 다물게 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결혼초부터 시작해 끝없이 이어졌던 시집식구들의 뒤치다꺼리였다. 어머니와 함께하니 집안의 경조사 책임은 우리 차지였고, 속 썩이는 자식들로 미칠 지경이었다. 마치 난 남편과 결혼한 것이 아니고 시댁식구들의 사후관리를 위해 시집온 일꾼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의 지칠 줄 모르는 요구와 당신 몸이 아픈 사연들을 듣고 있노라면 점점 방대해져 가는 숙제를 맡은 사람이 된 양 나는 점점 풀이 죽었고 어머니 뒤편에서 말없이 있는 효자남편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에겐 많은 자식이 있었지만 효자인 남편 하나만을 믿고 결혼하길 기다리신 것만 같았다.


'물에 빠지면 날 구할래, 어머니를 구할래?' 하는 질문을 하는 드라마 속 대사를 보면 속으로 '남편은 당연히 어머니겠지..'라는 생각에 급우울해져서 눈물까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와 결혼의 회의감마저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저 질문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설정 또한 알고 있다.


나는 어머니의 편견을 이겨내려고 악을 쓰다시피 하며 직장을 다녔던 것 같다. 친정으로 피신할 수도 없는 전장에 선 기분이랄까. 육아로 인해 나의 수면시간은 턱없이 부족했고, 조직에서 부족한 실력은 뛰어다니며 보충해야 했다.  조직의 유리천장을 깨고 임원으로 승진하고서야 드디어 어머니도 나의 직장이 남편과 같은 중요한 곳이란 것을 인식하셨다. 증명이 되자 오기로 시작한 나의 시간들은 숙명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어차피 내게 떨어진 무게라면 모두 받아 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도 맘 편하게 휴일을 보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셀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자 속 썩이던 시댁식구들이 잠잠해졌고, 무엇보다 당신의 손자들이 올바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내가 기둥역할을 한다는 것을 느끼셨다.


나의 고단함은 독서로 치유받았다. 그러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날은 가끔 술기운을 빌어 과감한 도발의 말로 어머니를 긴장을 시켰다. 이미 나의 도움이 익숙해진 어머니에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런 많은 시간들이 지나자 남편과 시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조금 일찍 깨달았다면 더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어찌 되었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깨닫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어머니는 영면하시기 2년 전부터 급속도로 쇠약해지셨다. 더욱 나의 도움이 절실하셨고, 케어를 끝까지 책임지는 내게 마음을 활짝 여셨던 시간이었다. 중년이 되어 다시 생각해 보니 내 운명은 어떤 경로의 경험이었든 소중한 결과물로 채워진다는 점이었다. 


남편은 10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래서 아버지역할이 어떤 것인지 모른 채 어머니의 고단함만을 보고 성장했다. 당연히 어머니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었고 거역하면 안 되는 착한 아들이었다. 남편과 나는 결혼초에 많은 부분 '대화 없는 싸움'으로 서로 힘들어했지만 이후 많은 시간을 '대화로 복귀'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서로 인정하게 되었고, 어머니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젖가슴의 부재'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아이에게 '생존'의 의미인 이 것은 '어머니'를 뜻한다. 자연스럽게 '젖가슴의 부재'를 받아들이면서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남편은 결혼 후에 건강하게 젖가슴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도 아들만 둘이 있으니 시어머니가 될 것이다. 남편과 내가 술기운이 오르면 늘 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뿌리가 되자'는 말이다. 오랜 기간 내가 겪어 힘들었던 시어머니의 불편함을 내 대에서 끝내고 싶다.

어느 이별이든 애도기간이 필요하듯이 내 아들의 짝인 며느리를 만나면 쿨하게 말할 생각이다. 아들의 빈자리가 익숙해져 가는 이별의 유예기간만큼만 봐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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