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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역사를 알고 살면 삶이 풍요로워진다.

역사가는 사실의 비천한 노예도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은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다. 역사가는 끊임없이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어 내며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어 낸다. 어느 쪽도 우위를 가질 수 없다.  이 상호작용은 현재와 거의 상호 관계도 포함한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사실을 가지지 못하면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존재가 된다. 역사가를 만나지 못하면 사실은 생명도 의미도 없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의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크로체의 말을 힘주어 인용했다. 사실은 과거의 것이고 역사가는 현재에 산다. 과거의 사실 가운데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는 기준과 그 사실들을 일정한 관계로 맺어 주는 해석의 관점은 역사가를 둘러싼 현재의 환경, 역사가의 경험, 역사가의 이념과 개인적 기질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다. 그래서 사실과 역사가의 상호작용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먼 과거에 관한 것이라도 역사는 현대사일 수밖에 없다.  역사란 오늘을 사는 역사가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과거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본문 中



이 책은 발간 당시 출판사의 대대적 홍보가 있었고, 유시민팬덤에 이끌려 구입했었지만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지식의 한계에 밀려 책장에 꽂혔었다.  4년이 지난 이제야 책을 읽고 리뷰를 적는다. 책을 다 읽었지만 그가 인용하며 서술한 역사서 18권을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4년의 유예기간이 있었지만 결국 포기에 가까운 마음으로 읽었기에 다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서양에 수많은 역사서가 존재한다.  현존하는 마지막 종인 '사피엔스'의 기록을 담은 역사서에 대한 평가와 공부는 현대인의 지적질문인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이유다.  역사를 잊은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도 우리는 수없이 듣고 자라왔다.  


이 책은  역사학을 공부하는 내용(학술 연구활동)이 아니라 역사서술의 역사를 열거하고 있고 무엇보다 역사서를 써 내려갔던 역사가들의 이야기와 그렇게 역사서를 집필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들을 말해준다. 역사가들이 집중하며 힘든 역사를 써 내려가려 했던 의지가 감정들을 쫓다 보면 역사서 이해는 물론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고대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을 써 내려갔던 '헤로도토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록했던 '투키디데스'부터 과학자의 시선에서 역사서의 획을 그은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까지 2,500년의 시간을 꽉 채운 역사적 사건을 하나씩 생각하며 읽으면서 때때론 가슴속의 파동의 울림을 느꼈던 것 같다.


아.. 역사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후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지난 역사의 평가가 냉엄하듯이 역사가에 대한 평가도 냉혹한 것이 현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역사가가 역사를 쓸 자질이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 나온다. 만약 기록하는 사람이 선택한 사실만 살아남아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적 사실'로 선택된다면 심각한 오류가 발견될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H. 카'는 평가와 해석이라는 주관적 요소의 세례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존재를 인정받고 무언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히 역사 문서보관함에서 꺼내 편집만 한다면 사장된 글을 서술한 것과 마찬가지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랑케'가 역사가로서 비판받는 것일 테다. 나는 '애드워드 H. 카'<역사란 무엇인가>의 아래 글이 참 멋지게 읽혔다.


"사실이 스스로 이야기한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역사가가 이야기할 때만 사실은 말을 한다.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주며 서열과 순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게 역사 가다. 사실이란 자루와 같아서 안에 무엇인가를 넣어주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한다. "




그는 역사가의 투철한 사명감, 기록될 역사로의 진정한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지적 해석능력과 경험, 뛰어난 기질의 영향만이 완성된 역사서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역사가로서의 기준은 이후 살이 붙어 토인비 사상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토인비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역사가의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는 기록이고 과학이며 예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 생활의 여러 현상을 드러내 보이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역사의 기법이다.  둘째, 사실을 비교 연구해 일반 법칙을 설명하는 과학의 기법이다.  셋째, 사실을 예술적으로 재생산하는 창작의 기법이다.  이 세 가지는 질서 정연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역사는 창작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사실의 선택, 배열, 표현 그 자체가 창작의 영역에 속하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고서는 위대한 역사가라고 할 수 없다는 견해는 옳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서는 어떤가. 저자는 민족의식을 세운 세 명의 역사가를 소개한다.  40년간 긴 세월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에 있으면서 수탈과 억압으로 문화와 역사가 말살되었지만 조선의 깨어있는 역사가였던 박은식은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쓰며 당대사를 기록하고 서술했다.  같은 시대에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조국광복을 위해 싸웠던 또 다른 지식인 신채호는 망한 지 오래된 조선의 정신을 살려 내기 위해 조선의 고대사 <조선상고사>를 새로 쓴다.


신채호를 소개하는 글을 읽을 때 피부에 와닿는 듯 아픈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조선의 광복 없이는 우리 민족 구성원 누구도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고 봤다. 모든 조선 사람이 투쟁에 나서고 무장 투쟁을 포함해 모든 수단을 거리낌 없이 동원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민족의 정체성을 인식하려면 역사를 알아야 하는데, 고려 시대 이후 시대에 찌든 역사가들이 쓴 것뿐이라 민족의식 형성을 오히려 저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민족의 고대사를 자주적 민족주의에 입각해 다시 쓰게 된다. 하지만 그는 독립투쟁을 벌이다 옥중 순국을 하여 삼국통일 이전 민족사만 서술하게 된다.


신채호는 조선의 문헌뿐만 아니라 중국의 조선 관련 기록에도 거짓이 너무 많아 상충하는 문헌 기록을 비교, 검토해서 사실 개연성이 높은 것을 채택한 뛰어난 역사가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선 안된다.


월북한 백남운은 정통 유물사관을 견지했던 식민지 조선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는 일제가 우리나라에 개입해 발전한 역사서를 부인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그의 <조선사회경제사>란 책에서는 우리 민족의 역사도 보편적 역사법칙에 따라 발전해 왔고 외부에서 이식하지 않아도 자본주의 단계로 이행했을 것임을 논증했다.


"종래 조선 역사의 내용은 왕조의 흥망성쇠, 군주의 행동거지, 신하들의 진퇴, 법령의 개폐, 군주의 득실, 신하들의 포상과 징계 따위에 관한 전제 정부의 일기와 전쟁사로 가득하다.  편찬의 체제는 중국의 강목식을 답습한 연대기적 분류사다.  역사의 주축이 되어야 할 민중 생활과 사회 구성의 발전 과정을 살피지 않았고, 역사적 사실을 단순하게 나열했을 뿐 역사 변동의 계기적인 법칙을 탐구하지 않았다."



역사가들의 능력에 따라 가치 있고 위대한 역사서로 보이는 것은 '서사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훌륭한 역사서 속에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보이고  사람의 꿈과 욕망, 의지와 분투가 보이고 사람이 세운 권력과 어둠이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서에 대한 탐구욕망이 불러일으킨 책이었는데, 선뜻 그 용기가 나서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이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지금도 내가 완벽한 해석을 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역사서가 당시의 군상의 감정과 생각을 전하는 서사라면, 현재 나의 삶도 나의 역사가 되는 것이라고. 역사를 알고 산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삶이 더 즐겁고 풍요로워지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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