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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프레임에 갇히지 말자

역사는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입니다.  수천 년 동안의 사람 이야기가 역사 속에 녹아 있어요. 그중에 가슴 뛰는 사람을 살았던 사람을 만나 그들의 고민, 선택, 행동의 의미를 짚다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게 바로 역사의 힘입니다.


본문 中




나는 머리가 복잡하고 힘들 때 역사 속 기록들을 읽는 습관이 있다.  학창 시절엔 시험공부를 위한 독서였다면 어른이 된 이후엔 암기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역사 속 인물의 삶 위주로 읽게 되는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역사의 쓸모'의 저자 최태성 씨가 낸 이 책은 바로 내게 필요한 독서요건을 딱 갖춘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역사에 관해 머리부터 짚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을 많이 외우고 정확히 답해야 점수가 나오는 학창 시절 기억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한번 외웠다고 계속 저장되는 게 아니라 그 미안함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저자 최태성 씨는 역사를 공부하고 정확한 기록을 외우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인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을사 5적을 배울 당시의 기분만 절대 잊지 말라고만 한다. 그 기분을 기억해 놨다가 사회에 나가서 책임이나 선택을 져야 할 때가 온다면, 당장의 영달과 상황을 모면하려는 결정을 하지 않고, 대의를 위한 선택을 한다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 결정이 자신의 인생에서,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하는 역사의 흐름 속의 결정이라는 확신이 선다면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궤적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우리는 삶 속에서 자주 길을 잃고 방향을 잃는다.  그럴 때 저자는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 보라고 한다.  충분히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그러므로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설득력 있다.


저자는 삶이라는 문제에 역사보다 완벽한 해설서는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끙끙대던 문제도 해설지를 보면 무릎을 탁 치며 바로 이해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될 때 역사의 인물을 찾아 그들의 고민과 선택을 차분히 이해하다 보면 답을 찾을 거라고. 저자가 추천하는 여러 인물들 중에 나는 고려시대 '서희'가 외교의 달인이란 면에서 좋아한다.


"이명박정부까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NCND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정부는 곧바로 속내를 드러냈어요. 사드를 배치한다고 해버렸습니다. 사드 배치라는 패를 숨기고 있어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데, 패를 보여줬으니 그 판에서는 힘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죠. 중국이 좋고 싫고를 떠나서 외교 문제를 그렇게 풀어가서는 절대로 유리한 위치에서 관계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서희와 소손녕은 자기 패는 보여주지 않고 상대의 패를 읽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고려와 거란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제삼자인 여진을 끌고 들어와서 완전히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버린 겁니다. 이 회담으로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얻게 됩니다. 거란에 땅을 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거란한테서 땅을 받아 온 거예요."


우리는 살면서 상대가 짜놓은 프레임 속에 갇혀 답이 못 찾을 때가 많다. 그럴 때 우리는 고려시대 서희의 배짱과 섬세하게 상대를 관찰하며 본인의 패를 놓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저자는 서희의 전략처럼 문재인정부 때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던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로 한일 무역분쟁이 있었던 사례를 상기시켜 준다. 


당시 우리 정부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 이후 후쿠시마를 포함해 인근 8개 현의 수산물 50종에 대한 수입을 금지하는 조처를 내렸다가, 2013년 원전 오염수가 바다로 유출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수입 금지 대상을 모든 수산물로 확대했는데, 일본정부가 이 조처가 부당하다고 WTO에 제소하면서 분쟁이 시작된다. 1심에서는 일본정부가 이겼지만 2심에서는 우리나라의 대연적극이 나온다. 우리 정부가 새로운 프레임을 짠 것이다.  한국은 일본과 가장 인접한 국가이며 '원전 사고'라는 특수 상황이 벌어진 만큼 환경이 식품에 미치는 잠재적 위험성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를 배제한 1심 결정은 적절하지 않다는 새로운 프레임 논리로 이긴 것이다. 


책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 외에도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나라를 위해, 대의를 위해 당당히 삶을 마감한 영웅들을 다수 알려주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피 끓는 죽음들을 열거할 때는 뭉클한 기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들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출간된 지 조금 된 책이지만 이제라도 읽게 돼서 참 감사한 기분이 들었다.


저자는 오늘을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역사는 흔한 오해와 달리 고리타분하거나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시대의 맥을 짚는 데 가장 유용한 무기이자 세상의 희망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죠.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우리는 늘 불안해합니다. 이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것입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나아졌듯이 미래는 더 밝을 거라고, '나'보다 '우리'의 힘을 믿으며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면 된다고. 역사를 통해 혼란 속에서도 세상과 사람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다시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건 역사지만 

결국은 사람을, 인생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역사의 쓸모_최태성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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