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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똥집 사연

21년 전 추억 속으로..


21년이나 묵은 글입니다.  당시 온라인 문학동호회에서 해마다 기념문집을 발간했었고 이사를 하면서도 버리지 않고 지금껏 보존하고 있었네요.  아들방 책장 구석에 있었나 본데 어젯밤 심심하던 아들의 눈에 띄었었나 봅니다.  


오늘 아침에 아들이 웃으며 내밀었고 소파에 앉아 저도 다시금 제 글을 읽어 봅니다.  당시 어설펐던 여인의 모습이 보이고 상황들이 손상 없이 그대로 펼쳐지더군요.  기록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망각의 동물인 인간일지라도 활자를 통해 다시금 시간을 거슬러 정지시키니까요.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그랬구나, 그 정도로.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상태의 글이니 너그러이 봐주셔요.  검색해 보니 당시 물가와 현재 물가를 비교하니 10배는 올랐네요. 





복날인 어제.

삼계탕을 끓일 요량으로 퇴근 후, 전철역 부근 대형 할인매장에 들렀다.

알뜰한 주부들이 한바탕 모이는 시간대에 운 좋게 걸린 나는

먹기 좋고 저렴한 삼계닭을 두 마리 사게 됐다.

동네 지하슈퍼에서 한 마리 값으로 두 마리를 사게 된 나는

갑자기 알뜰한 주부가 된 양, 의기양양해져서 남게 된 한 마리 값에 대한

투자를 할 요량이 생겼다.


그러던 중.

닭코너 아랫부분에 닭똥집이라고 쓰여있는 팻말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닭똥집을 구워 기름소금에 찍어 먹으면 소주안주론 기가 막히다.

저녁에 간단히 삼계탕을 먹고,

남편과 고급 안주인 닭똥집과 소주를 먹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미치자 입가에 행복한 미소와 함께 가격을 물어보게 됐다.


"손질한 것은 10개 천 원이고, 손질 안 한 것은 무더기에 천 원 이유~!"


손질 안 한 것은 눈대중으로도 족히 100개는 넘게 보였다.

분주히 구매하는 아줌마들의 틈에 끼인 나는 분위기에 휩쓸려 당연한 듯

무더기 닭똥집을 사가지고 흡족한 마음으로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참 무거웠다.

무거운 만큼 소주안주가 생길 테니 더 이상 무게라는 이유로

구매에 대한 후회가 생길 리 만무였다.


하지만, 그 닭똥집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천대를 받기 시작했다.


"야야~ 그거 손질하기가 얼마나 귀찮은데 그걸 사 오냐.. 그래!"

".. (뜻밖의 말씀에 약간 기가 죽어서) 제가 손질할 거예요. 걱정 마세요."


닭을 부랴부랴 삶는 싱크대 옆 칸에서 나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닭똥집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흐르는 물속의 손질이라 해도..

똥은 똥이었다.

그리고 씻어도 씻어도 끝도 없는 닭똥집의 분량에 나는

점점 똥을 만진다는 기분과 함께 나빠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서서 손질하다 보니..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뻐근해지면서 통증이 옴에도 불구하고

하던 손질을 멈추고 쉴 수가 없는 상황이 더 짜증으로 다가왔다.


일하고 퇴근한 며느리지만,

어머니는 며느리 술안주 손질을 해 주실 리가 없다.

남편은 부엌 근처로 오면 큰일이 나는 줄 교육받은 전통적인 한국남자라

더더욱 기대하기가 힘들다.


내가 왜 손질된 닭똥집을 사지 않았든가.

택시비 2000원이 아까워 갑자기 알뜰주부가 된 양

냄새나는 비닐봉지를 들고 남들 눈살 찌푸리는 마을버스를 탔든가.


온갖 후회와 힘든 짜증이 곁들린 손질은 장장 세 시간 반의 고투(?) 끝에 마무리 지어졌다.

소쿠리에 깨끗하게 손질된 닭똥집을 보면서 저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닭똥집에 소주는 언제쯤 먹을 수 있어?"


난 당연히 남편에게 욕만 한 바가지 먹여줬다!




ps. 내가 알고 있던 닭똥집은 사실 닭의 모래집, 근위(筋胃)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답니다.  

닭똥이라 생각했던 것은 닭이 집어먹었던 모래들과 음식물찌꺼기였던 거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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