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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흔들리는 확신, 흔들리는 목소리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이 책은 작가가 기존에 출간했던 추리소설과는 결이 다른 심리서스펜스 장편소설이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입지를 세워가던 중에 잠수를 탄 침묵의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 필명으로 낸 소설이라고 한다.  당시 남편의 외도로 인한 충격이 그녀에게 외부와의 단절로 이어졌고 그로 인한 모종의 깨달음이 이 소설에 함축되었다는 것이 평론가의 의견이다.  아마도 그녀는 선입견 없이 작품 하나로 평가받기를 원했을 것이다.  나는 정말 마음에 든다.


소설은 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주인공 '조앤'의 언행을 지켜보게 하다가, 어느 순간 주인공 '조앤'의 시점으로 들어가 자기 고백과 자기혐오로 힘들어하는 내면세계를 탐색하게 된다.  복잡하지 않은 등장인물과 구도, 전개된 시간의 구성이 짧기 때문에 우리는 집중해서 저자가 주도하는 인간의 심리와 관계성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정확히 깨닫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잠시 멍한 상태가 되었고 짧은 탄식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런던 근방에서 변호사 남편과 장성한 세 자녀를 두고 중상계급의 집안에 사는 '조앤'은 자신을 가정의 대소사를 완벽하게 관장하고 이상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라고 자평한다.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고 책과 바느질을 가까이하는 품위 있는 영국여인이며 하인들도 완벽하게 다루어 존경을 받고 지역 단체에서까지 활기차게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족의 완벽한 삶은 자신이 주도적이고 단호한 원칙을 지킴으로써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바그다드에 사는 막내딸이 중병 소식이 들려오고 병문안을 서둘러 갔던 조앤은 쉽게 회복된 딸에 안도한 뒤, 배웅을 뒤로하고 영국으로 귀가하게 되는데 폭우와 기차 지연으로 사막 한가운데 있는 기차역 숙소에서 며칠간 발이 묶이게 된다.  그녀는 영국으로 가는 기차가 오기까지 휴식의 기회로 받아들인다.  일상 속에 던져진 평화로운 휴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그곳에서 추레해진 바람둥이 동창 '블란치'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평화로운 휴식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상기후는 며칠간 계속되고 자기만족에 빠져 살던 그녀에게 인적 없는 사막의 숙소는 흡사 감옥과도 같이 변해 버린다.  틀에 짜인 삶, 곳곳에 자신의 손길과 간섭이 필요한 곳에서 더없이 단조롭고 불편하고 냄새나는 사막의 숙소는 생각할 거리가 없는 곳이다.  

게으른 인도인, 닭, 통조림 깡통, 국경에 끝없는 가시철조망, 찌든 기름진 냄새 그리고 사막과 뜨거운 태양만 있는 곳에서 소일거리(책, 편지 쓰기)조차 소용 없어진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과 친구, 과거 총장이 자신에게 던졌던 말투, 행동에 대한 탐구로 시작해서 서서히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그녀는 그녀를 향해 웃었던 미소들이 비웃음, 가여움, 멍청한 여인에게 보내는 슬픔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진실의 편린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녀의 삶 전체에 있어 끊임없이 진심을 보냈던 남편, 아이들, 동창들이었지만 그녀 스스로 외면하던 순간들이 쌓여 가면서 그녀의 삶은 현재의 사막에 고립된 자신과 다를 바 없음을 뼈아프게 깨닫게 되고 몸서리친다.  

자기 확신에 균열은 사막의 구멍에서 머리를 밀고 나오는 생각의 도마뱀들이 사라지면서 그녀는 구원을 얻는다.  이제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때마침 영국행 기차가 운행되고 소설은 안정된 결말을 향해 달렸다.  얼마나 아름다운 결말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런던에서 그녀는 흡수되듯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조앤으로 변한다.  소설은 예전의 조앤으로 다시 살아가며 끝난다.

그녀가 사막에서 마주한 진실들은 진실이 맞았을까, 그저 그녀의 망상이었을까.  나는 잠시 혼돈이 왔었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남편의 시점으로 쓰인 글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놀랐고 슬픈 감정에 휩싸였다. 그녀에게 있어 사막에서 보냈던 시간은 가족과 세상으로 복귀할 일생일대의 깨달음이었다.  모두 진실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애써 다시 외면했고 껍데기인 유물론의 세상으로 안주하기를 선택했다.  작가의 결말에 나는 한동안 실망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탓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며 살아가고 있나.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는 중요치 않고 본인의 의지와 감정에 따라 어렵고 가난한 삶이라도 만족한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지만 가족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상류층에 끼기 위해서 사회적 틀 안에 내 삶을 맞추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직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고민을 정확히 제시하는 소설이다.  소설에도 나오지만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데로 따르던 사람들은 돈에 찌들어 산다.  남편과 세 자녀들이 영국의 중산층 유한계급으로 살기 위한 조건을 디테일하게 제시하는 조앤이 미워도 따랐던 것은 환경이 주는 안락함이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보다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양가감정으로 고민하지만 종국에는 조앤의 결정을 택한다.  그들에게는 불쌍한 아내, 어머니라는 묵인된 합의가 유일한 도피감정이었을 것이다.

인간만큼 환경에 지배당하는 존재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조앤은 악인도 피의자도 아니다.  소설이 끝나도 우리는 이야기 속 존재에 대한 미래를 그려본다.  그녀는 어떻게 살아갈까.


나는 조앤이 혹독한 고립에서 깨달았던 확신의 감정은 분명히 가슴속에 기억하며 살거라 생각한다.  다행인 것은 남편도 자식들도 조앤을 불쌍하게 바라보지만 사랑하는 감정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그 바탕 위에서 조앤이 내면을 직시했던 그 경험은 새로운 불화의 사건 출문시 회상이 될 테고 긍정적으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거라 믿는다.

우리는 정말 너무 잡생각이 많다.  소설을 읽다 문득 정말로 아무 안전장치 없는 자연 하나만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진다.


.. 정말 나와 만나게 될까.



<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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