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나는 '행복'이라고 썼다.그러자 사람들은 내가 질문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말했고,나는 그런 그들에게당신들이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되받아쳤다.
-존 레넌
식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아침상에는 애매함이 남아있다. 아침 입맛이 없지만 망설이다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새 수저를 꺼내 남편이 남기고 간 밥과 아이가 먹다 남은 샐러드를 해치운다. 집안에 남은 엄마들의 아침은 대부분 이렇지 않을까, 잠시 생각하다 남겨놓은 과일 몇 개 마저 입에 넣고 일어선다. 입 안에 뒤섞인 식감을 잊기 위해 커피를 내릴 예정이다.
정체 모를 아침이 후식 하나로 귀족으로 변하는 나의 시간이 찾아왔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공작부인처럼 허리를 곱게 펴고 원두를 갈고 드리퍼 위에 여과지를 올려놓은 뒤, 곱게 간 원두를 담고 드립포트의 물을 조심스러우면서도 우아하게 내린다. 원두가 드리퍼를 통과하며 퍼지는 커피 향과 눈치 보듯 조용히 내려가는 커피물 소리가 귀여워 다정히 얼굴을 내민다.
머그잔 한가득 담은 커피를 보물인양 조심조심 식탁 위로 옮겨 놓는다. 목줄기로 내려가는 커피의 행로가 느껴지면 눈이 저절로 감기고 흐뭇한 미소가 나도 모르게 피어난다. 핸드드립커피 하나에 뭐 그리 감격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내겐 그렇지 않다. 완전히 정착된 생활습관의 행복,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나만의 시간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마치 이 커피를 만나려고 나의 지나온 시간들이 시행착오를 거친 느낌이 들 정도다.
갓 내린 원두커피를 마시다 보면 옛날 대형스탠드형자판기가 떠오르고 동전을 넣으면 덜그럭 거리며 내려오던 종이컵에 마술처럼 담겨 있던 커피가그려진다. 완료음이 끝나기도 전에 손은 빨리 꺼내고 싶어 종이컵을 쥐고 있던 사회초년생인 어린 내 모습도 보인다. 어서 일을 배우고 싶은데 커피심부름만 하던 때였다. 어느 날 자판기 청소를 하던 직원이 내부를 공개했을 때 지저분하게 떡진 프림덩어리들로 놀랐던 기억이 있다.
자판기의 업그레이드 격인 인스턴트커피믹스의 기억은 밥보다도 커피를 더 많이 마시며일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시절이다. 책상 위 수북이 깔려있던 종이컵 속 잔류커피는 각성제 역할 뿐이었던 사무실 풍경과 함께한다. 과다한일 량이 너무 힘들어 사직서가 책상서랍에 늘 있었지만 꺼낼 수도 없는 현실이 우울한 시기였다.
나는 결혼하고 나서는 삼시 세끼 굶지 않고 주인 독촉 없이 머리 대고 마음 편히 잠잘 곳만 해결되면족한소망이 다였다. 그 소망을 이루려고 삼십여 년을 남편과 직장생활을 했다. 알고 보니 그 소망은 쉽게 이루기 힘든 것이었다. 이루기 힘든 목표였지만 이루고 나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이제 그 모든 소망을 이루고 근사한 카페 기분에 젖을 수 있는 매일아침을 내 마음대로 즐기고 있으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만족감은 삶의 질과 비례함을 느낀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체제에서 물질의 소유는 개인의 욕구와 부합되어 더 좋은 신제품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생활수준이 올라가면 그 위치가 기본값이 되어 소비가 업그레이드되어야 하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기업은 쉴 틈 없이 신제품 출현의 광고가 쏟아내고 현재의 것은 쓸모없고 낙후된 쓰레기처럼 보이게 만든다.
나는 새로운 문명의 변화를 맞이할 때 의도적으로 자신의 과거소비 성향을 소환하길 권하고 싶다. 과거는 잊힐 대상이 아니라 기억하는 존재여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우리가 소비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절제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멈출줄 알아야 한다.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할 줄 아는 양심이라고 해도 좋겠다. 소비자가 절제하지 않으면 제조기업은 광고를 통해 과소비를 조장할 수밖에 없다. 기업은 이윤추구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욕망을 부추기는 상술을 끊임없이 펼친다. 소비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스스로 만족하는 선에서 멈추고 만족하는 습관을 찾아야 한다.
나와 식구들은 모두가 만족하는 원두커피 맛을 찾은 뒤로는 원두를 직접 구매해 마시는 것으로 정착하고 있는데,가성비가 참 좋다. 가끔 외부에서 커피를 사 먹을 기회가 오면 자연스럽게 집의 원두 가격과 환산하면서 아깝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장거리 여행을 가게 되면 집에서 원두를 내려가거나 커피드립세트를 아예 가방에 넣어 간다.
문명의 발달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개성을 찾는 시간을 할애할 수 있으려면 물질의 소유에서 좀더 자유로져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만큼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인 소유물에 대해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은 물건을 사는데 과도하게 돈을 쓰고 있다.
내 소유물에 익숙해지면 편안하게 자신의 인생에 관여된 사람들과의 관계와 내 취미에 몰두할 수 있다. 새로운 경험에서 오는 행복은 물질이 아니어야 한다. 소비는 행복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