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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



불행이 터졌을 때보다 불행이 지나간 후가 더 중요하다.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를 기대해 봐야 소용없다.  불행의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태만이나 무모함, 불성실을 후회하기에도 늦었다.  불행은 그 자체로 징계다.  불행이 이미 지나갔는데 자기 징계를 반복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오는 비극이 된다.  명백히 저지른 실수에 대해 변명하거나 축소하거나 미화할 필요는 없다.  깨끗이 인정하고 징계를 받고 우연히 생긴 비극으로 인생의 페이지에 적어둔 뒤 책장을 덮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인생은 고통이고,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므로, 집착을 버리면 고통의 소멸에 이룰 수 있다는 '비관에 대한 비판'을 제시한 19세기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을 정리한 책이다.  아포리즘(aphorism)이란 뜻은 깊은 잠언, 격언, 명언, 경구란 의미로 삶의 체험적 깨달음을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한 글을 의미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활동하던 시기보다 후세에 더 많이 거론되고 유명해진 인물이다.  당시 주류 철학은 인간이란 존재의 규정을 '생각하는 존재' 혹은 '이성적인 존재'로써 원초적인 욕망을 억제할 줄 아는 존재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이성과 합리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쇼펜하우어 철학은 오랜 기간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이후 대규모 전쟁 등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다시 주목받게 된다.


주류에 편승하기를 거부하고 당당히 자신의 체계를 세우려던 그의 노력이 뒤늦게 인정받게 되면서 수많은 거장들의 다양한 정신세계(철학사적, 심리학사적, 문학사적, 음악사적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으로는 니체. 톨스토이,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바그너 등이 있다.  그는 당대의 주류로부터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다수는 그저 많은 숫자일 뿐, 많다고 정의가 되는 건 아니다"라며 무능력하다는 편견을 반대한 당당한 인물이다.  


쇼펜하우어는 출생과 죽음은 공통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출생은 무에서 나오고, 죽음은 무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는 인도철학에서 기인된 사상이다.  그의 서재에는 칸트의 상반신 초상화와 청동불상이 놓여있었다고 전한다.  그만큼 그의 철학은 칸트의 사상과 인도철학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 느낌을 많이 받는다.  


우리는 그를 염세주의자로 부르지만 그의 글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다.  그 어떤 철학자보다 삶과 죽음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으며 생각한 인물이다.  그는 죽음이 오면 오로지 고통에 찬 '의지의 주체'만 사라지며 주체가 없어진 상태에서 드디어 완전히 홀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해탈의 과정인 범아일여(梵我一如), 본질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최선을 다해 삶을 마주하고 인간의 내면을 직시했다.  그는 행복해지고 싶었지만 결국 불행해져 버린 인간의 삶의 비극적인 면면을 철저히 탐구한 철학자다.   


이러한 그의 철학적 맥락을 이해하고 이 책을 마주하면 읽기가 편안해진다.


책을 열기 전 표제인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를 마주한다.  띵 하고 멈추는 제시어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솔직해야 한다.  왜 힘든 것인가.  왜 행복하지 않나.  무엇을 얻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나.  고민하며 책장을 연다.


"행복이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행복을 활동 그 자체로 본다.  행복하다는 것은 내가 지금 잘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가 잘 산다고 느끼는 까닭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요약하자면 행복은 '잘하고 있다'는 지속이다."



생명체로써 현재 존재하는 나의 이 상태가 이미 행복하다는 입증이다.  우리는 가족의 누군가 다치고 아프고 나면 깨닫게 된다.  '아프지 않았을 때가 좋았던 것 같아, 편안하게 같이 밥 먹던 때가 그립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머릿속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제거하면 지혜를 만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제시하는 인생의 지혜는 간단하다.  "행복이란 단어를 제거하라"


그는 외부적인 완벽한 조건을 충족하기에 앞서 그는 불행의 정체(가난, 경쟁, 피로, 권태, 질투, 죄의식, 피해망상 등)인 내부적 요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청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뭔가를 얻기보다는 뭔가를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라는 것이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난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건강해지려는 욕심을 버리고, 병에 걸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즐겁게 놀기보다는 욕을 먹거나 비난받지 않도록 한다.  이것은 다분히 현실적인 생활수칙이다.  이 수칙들을 지킨다면 작지만 확실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머릿속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제거하면 이 수칙들을 좀 더 쉽게 지킬 수 있다."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위선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다.  가장 행복한 선택이며 지혜의 시작이다.  어떤 일을 만나도 너무 기대하지도 너무 실망하지도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놀라지도 말라고 말한다.  이는 중용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쐐기를 박는다.


"인생이라는 게, 사실 크게 휘둘릴 만한 가치가 없다."


허태균교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합유연성'이 강한 민족이라고 정의했다.  모든 것은 서로 다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강해서 맺고 끊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식당에 국밥을 먹으러 갔으면서도 반찬이 푸짐히 나와야 '맛집'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지 않으려는 성향은 의식의 습관과도 같다.  온전한 하나만 챙기고 나머지는 깨끗이 단념하는 마음가짐이 지혜롭게 인생을 사는 방법이다.  


내가 생각하는 불행의 정체를 따져보고 불행을 제거하는 쪽에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행이 닥쳤다면 징계를 이미 당했으니 자신의 불행을 더 이상 소환해서 징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그의 말은 확실한 위로가 된다.  불행이 지난 후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나는 작년 심장마비로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조금 더 엄마 곁에 머물지 않고 일어선 것을 오랜 시간 자책했다.  그로 인한 심한 스트레스로 생어금니가 빠지고 이명으로 보청기까지 하게 됐다.  불행의 이중고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폭풍 같은 시간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라고 말했다.  인간은 내면이 공허하고 권태로울수록 외부로부터 자극을 채우려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 타인의 시선에 욕구를 채우려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내 권태가 찾아오고 더 자극적인 욕망을 쫓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고통은 혼자가 될 수 없는 데서 비롯된다고 봤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혼자가 되는 시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수많이 훌륭한 작품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견뎌낸 사람들의 고독이 빚어낸 결론이란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자.


나는 요즘 가장 평온하고 조용하고 온전한 혼자의 시간에 감사하며 지낸다.  아무 일 없는 조용한 일상은 가장 행복한 시간임을 느낀다.  우리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다.  불필요한 주변의 관계와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질문하고 사색해 봐야 한다.  


절망 끝에서 인생을 해석한 그의 글이 통증이 아닌 가치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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