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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사랑을 묻다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 변천사


남녀의 자발적인 사랑이 결혼제도와 조화롭게 결합하는 양상은 근대에 들어와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랑과 결혼의 민주화를 이루려면 일차적으로 전근대 신분제가 해체되고, 중매혼을 거부하는 새로운 열정의 공식이 전제되어야 했다.  20세기 초 조선에 등장한 '연애燃愛'라는 용어는 성, 사랑, 결혼을 구성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유입되었음을 알린다.  '연애'라는 용어는 메이지시대(1867-1912)의 일본 문화를 경유하여 조선에 유입된 새로운 사랑을 지칭한다.



부제로 '한국문화와 사랑의 계보학'이라 칭하는 '역사에 사랑을 묻다'란 이 책은 말 그대로 한국역사에 근간한 문화적 텍스트를 통해 '사랑이란 열정'에 대한 주제를 분석한 흥미로운 책이다.  아마도 한국인의 사랑에 대한 계보학을 정립한 책은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저자의 문화적 연구가 치밀하고 그 내용이 탄탄하다.


사랑이라는 열정은 인간본성의 욕망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동양 문화영향과 유교성향의 억누른 감정의 사치로 치부되면서 역사적 정리가 뒤쳐진 경향이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시대적 자료를 통해 당시의 시선을 정리하였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성의 정립을 세세히 추적했다.  


17세기 이전까지의 소설을 살펴보면, 양반 남성과 여성이 중매혼이나 정략결혼의 규범에 구속되지 않고, 먼저 자유로운 성애로 맺어지고 나서 나중에 혼례를 치르는 이야기가 전형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의 금오신화의 작품들(주생전, 위경천전, 상사동기)을 보면 하나같이 남녀 간의 애정이 혼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난관, 혼인 이후의 갖가지 장애로 인한 남녀의 이별, 또는 죽음에 이르는 서사를 띠며 사랑의 결말을 허무하고 비극적으로 다룬다.  현실 생활에서는 진지한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신선이나 귀신의 허황한 세계를 통해 보충받고자 의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오신화'와 같은 조선시대 소설에 등장하는 연인들은 현실적 장애나 제도적 강압에도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열정적인 사랑의 주인공들이다.  조선 전. 중기 소설에서 로맨스의 전형은 군자와 요조숙녀, 혹은 재가가인이 서로 만나 사랑에 빠지고 종국적으로 혼인의 예禮를 갖추어 부부가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남녀의 우연한 만남과 자발적인 성애는 제도적 규범보다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 욕망을 우선시한다.

(중략)

'구운몽'에서 드러나는 허무의식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불교적 깨달음과 같은 맥락에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욕망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유한한 인간의 욕망이 내포하는 절실한 의미를 증대시키는 장치로 작용한다.  조선 전. 중기 소설에서 사랑은 어떤 정신적 숭고함으로 이념화되거나 초월주의적 언어로 번역되기보다는 육체적 열정이 주도하고 사랑의 물질성, 배타적 주관성, 현세의 덧없음이 뒤얽혀 있는 인간의 사랑이 가지는 보편 속성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서사는 조선후기로 갈수록 자취를 감춘다.  남성중심적 사회규범에서 조선후기의 소설들은 사랑의 판타지는 기방과 같은 풍류공간으로 이동하고 풍류공간에서 향유된 사랑은 혼인에서 소외된 결핍을 판타지로 보충하고자 하지만 그 허구성으로 해체되고야 만다.  또한 유교 이념에 구속되면서 사회규범에 반감을 품은 여성들은 동지애를 공유하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근대에 이르러 연애는 국민국가 이념과 관련이 지어지는데, 이때는 일본문화를 경유하여 조선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수많은 작가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사랑'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진다.  메이지 초기 문명화를 토대로 한 새로운 국가의식은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와 평등한 남녀관계를 주창하여 연애를 발흥시키는 근간이 된다.


1920년~30년의 신여성들의 자유연애 이상주의자들의 활동이 눈에 띄었다.  그때의 사회계몽의 불길 속에서 연애를 논했던 그 시대야말로 사랑의 의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지만 계몽적 자유연애의 1세대 여성 지식인들의 화려한 등장은 일부 신여성들의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낙착되면서 오히려 시대와 가장 격렬하게 불화하게 되는 역사적 모순을 경험하게 된다.


책을 읽다 보면 나의 사랑의 열정에 역사계보는 어디쯤일까 짚어보게 된다.  다행히 나는 '사랑하면 결혼한다'는 자유연애결혼의 공식을 통하는 시대다.  책을 통해 사랑 역시 시대적 이데올로기의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을 어떨까.  동거로 검증하고 결혼을 하게 될까.  결혼을 멀리하는 싱글족의 양산으로 극소수의 선택으로 변할까.  저자 '서지영'문학사학자의 다음의 계보는 누가 될까.  



<역사에 사랑을 묻다 / 서지영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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