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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나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권리


결국 1인 1표의 민주주의 법치주의가 자기 파괴적인 자본주의의 폭주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인지 모른다.  우리 중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쓸모없는 노동력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미래에 보통선거 원칙이 우리 미래를 공동구매할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밑천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사석에서였지만 일정 교육 수준 이상, 또는 일정액 이상 납세한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분들을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이런 사고방식이 확산되면 마지막 밑천조차 없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검사 출신의 대통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통적 권력기관은 물론이고 모든 영역(정책 전문성이나 경험이 꼭 필요한 사회경제 분야까지도)에 검찰 편중 인사로 배치했다.  검찰의 영향력이 행정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된 검찰 공화국인 셈이다.  정치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하는 기관의 정치란 감시자 없는 독재성을 띨 수밖에 없고 민주주의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왜 우리는 정치를 걱정하는가.  정치는 모든 시민이 자신의 권리를 지킬 마지막 보루기 때문이다.  


저자 문유석작가는 23년간 부장판사를 역임했으나 법치의 한계를 깨닫고 법복을 벗고 사임했다.  판사 시절 예민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칼럼을 다수 집필했던 것을 다듬고 보완하여 이 책을 출간했다고 한다.  이 책을 포함해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를 꿈꾸는' 그의 도서는 독서계에 큰 호응을 얻었고, 이후 많은 책들이 출간되고 '미스 함무라비'란 책은 드라마로도 방영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가끔 이기주의자와 혼용해서 사용하곤 하는데 '개인주의자'는 사회라는 공간에서 내 자유를 영위하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 속 필수 행동주의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합리적'이라는 '부사'를 앞에 붙였다.  내 자유를 침해받지 않기 위해서 나도 타인을 존중해 주고,  내 자유를 때로는 자제해야 하고, 타인들과 타협하며 연대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즉, 내 행복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위해하고 궁지로 모는 행위는 '이기적'인 것이며 그런 사람은 종국엔 사람들에게 외면당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개인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녹록지 못하다.  특히 조직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려면 일명 '사회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수직적인 조직에서는 더욱 심각할 것이다.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야 말로 사회에 완벽히 적응하고 있다는 안전과 출세를 보장받는다면 개인이탈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우리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든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를 비판한다.  집단주의사회에서는 관계의 속성이 작용한다.  타인과의 관계, 집단의 이익을 위해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나를 희생하고 복종과 의무만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순종하는 관계를 요구받고 진영논리에 갇히다 보면 자아는 고립되고 생존의 위협마저 느끼게 될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이유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판사직을 내던졌을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근간을 이루는 '개인주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21세기를 맞이했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중고등학교 때 지루하게 배우던 로크, 밀, 몽테스키외, 루소 등의 이름과 함께 나오는, 지금의 서구식 민주주의 근간을 이룬다는 그 개인주의 말이다.  


무슨 시대착오적인 소리냐, 19세기 얘기를 21세기에 하고 있냐는 반문이 나올 것이다.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약의 근원이라며 앞에 '포스트' 내지 '후기'가 붙은 길고 복잡한 대안을 얘기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은 이거다.  


도대체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 이전에 구자유주의라도 제대로 해본 적이 있는 사회일까? 자본주의 후의 대안을 모색하기 전에 제대로 된 자본주의라도 해본 적이 있나? 근대적 의미의 개인을 존중해 본 경험 없이 탈근대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 아닐까?



우리는 북유럽이 자본주의를 체계화한 경로를 밟은 적이 없다.  그들 국가도 우리처럼 재벌도 있고 빈부격차도 있지만 자기 과시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성숙한 배려의 문화가 정착된 나라들이다.  우리가 동일하게 가진 자부심이라면 온전한 자유와 권리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뿐이다.  


집단주의 문화는 개인의 이익을 한사코 감춘다.  개인의 복잡 다양함을 나약함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인문학적 사유가 필요한 사건을 개인의 일탈로 규정한다.  무엇보다 개인의 성장을 무시한다.  현대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시대기도 하지만.


합리적 개인주의자가 행동하는 양심은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만이 우리가 후불제 민주주의를 치르는 대가기도 하다.  저자는 그것을 조폭의 의리를 버리고 시민의 윤리를 선택하는 용기라 칭했다.  우리가 그동안 집단의 이익이라 참고 묵인했던 것들이 조폭의 의리와 다를 바 없다는 자조 섞인 비난이었다.  씁쓸했다.


먼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의식을 정비해야 한다.  비리를 발견하면 조직의 눈먼 의리를 버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민의 윤리다.  시민의 이익을 위해 내부고발자를 우리는 끝까지 보호해줘야 한다.  그는 한 점 티끌 없이 고결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표현까지 썼다.  그래야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 감시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인주의자 선언'을 해야 하는 이유는 결국 나의 '행복'을 지키기 위함을 잊지말자.



<개인주의자 선언 / 문유석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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