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졸업 후 5년쯤 지났을 때였다. 간단히 안부를 묻는 대화가 오간 후 그가 대뜸 삼천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트럭을 사서 장사를 하겠다고 했다. 젠장, 이것이 스승의 은혜였던가. 화가 나지는 않았고 좀 서글펐던 것 같다. 당장 전화번호를 바꿨다. 지금도 가끔 그에게서 나던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생각난다. 그럴 때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김춘수의 <꽃>을 바꾸어 읊조려본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철저하게 잊혀진 남이 되고 싶다
- 신규교사로 임용된 고등학교에서 문제의 K와의 웃픈 이야기 中
'구론산바몬드'라는 필명으로 책을 낸 브런치이웃분의 따끈따끈한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X세대(1970년대)로 80년대에 초중고와 90년대 대학을 다녔다. 철학을 전공하다 영어교육으로 전과, 편입해 임용고시를 거쳐 영어교사가 되었다. 그 시대를 통과한 사람으로서 절대적으로 공감할 사회정서, 지금은논란이 다분할 학교체벌, 군대이야기 등도 나는 자연스럽게 읽힌다.
문득 예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응답하라 1988'이 떠올랐고 이 책을 소재하여 아예 시트콤을 엮어내면 좋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의학기술이 아무리 발달되어도 사람에게서 얻는 웃음약만큼 큰 에너지도 없을 테니까.. 그만큼 재미있다. 또 글을 더욱 빛나게 한 삽화도 한 몫했다. 완성을 위해 정성을 기울인 책이다.
저자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렵게 성장했다. 어렵다는 표현은 하루 세끼조차 해결하기 힘들었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둡고 진지하게 살았어야 할 저자는 지나치게 밝고 긍정적이고 유머스러웠다. 나는 그 점이 상당히 놀라웠다.
나는 그 원천의 힘을 부모의 믿음과 사랑이었다고 해석한다. 성격형성의 원천인 유년시절의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유심히 관찰을 했는데 밑바닥 삶을 이어가는 부모님을 부끄러워 원망하기는커녕 불만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런 삶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과 소신을 이루려면 어떻게 노력할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 책은 그의 성장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에세이집이다. 열등했던 초등학교시절의 기억에서부터 재수 이후 임용고시 합격, 그리고 부임 후 겪는 제자들과의 에피소드, 학교 내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솔직하게 그려주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시절, 내 옆에서 공부하던 때론 까불던 친구들은 어떻게 지낼까 안부가 궁금해진다. 작가 특유의 밝은 관찰이 없었다면 이입하기 불가능한 감상이다.
개인적으로 3부 <살다 보니 웃픈 일 많더라>가 제일 좋았다. 현직 교사시절 겪었던 다양한 학생들과의 에피소드와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모르는 교무실에서 소소하게 얽힌 감정싸움이 주를 이루는 내용이다. 지금은 교권추락이라는 시대적 대책이 시급한 상황에서 이질적인 이야기로 읽히기도 하지만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선생님이란 직업군에게 엄격히 부여하는 책임감, 사명감을 부여하기에 앞서 그들도 흔들리는 감정의 소유자란 사실을 먼저 인정해 줬으면 좋겠다.
이제 제자로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두렵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열심히 가르치고 나름 애정으로 돌봤던 제자에게 배신의 칼을 맞기가 싫어서다. 사랑했던 제자가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게 끔찍해서 차라리 모르고 싶다. 선생님에게 사기 치지 말자, 제발! 세상 물정 모르는 선생님은 사기그릇과 같다. 치면 깨진다.
책 내용은 에피소드 중심으로 짧고 가볍게 웃으며 읽기에 최고다. 다만 시대가 변해서일까, 교권의 추락의 현실에 읽어서일까 마냥 웃으며 덮기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저자는 20년간 초, 중, 고의 교편을 잡았고 현재는 중학교 교감으로 근무 중이다. 교감의 역할은 학교의 모든 교육 활동을 실무적으로 관리하는 중요한 자리다. 위로는 교장을 보좌하고 아래로는 교사를 관리지도한다. 저자는 지금 어떤 표정과 어떤 마음으로 교감역할을 하며 이야기를 쓰고 지낼까 궁금하다. 아무리 어둡고 자잘하게 놓칠 일상의 이야기일지라도 밝고 유쾌하게 해석한 저자의 이번 책을 읽고 나니 교감으로써 써 내려간 또 다음 글들이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