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 밖으로 옮겨진 시체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수프를 먹었다. 만약 그때 내가 정신과 의사로서 직업의식을 가지고 나의 감정 결핍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일을 기억해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그 일이 나에게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회고록 중에서 가장 슬펐던 글이다. 죽음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인간은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죽어가거나 또 이미 죽은 것을 너무나 일상적으로 보게 되면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조금 전 죽은 사람이 먹다 남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감자를 낚아채 자신의 입으로 향하고 신발과 외투를 벗기고 차지하며 좋아한다.
20세기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물질적 풍요를 누린 시대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전쟁과 혁명으로 지옥 같은 살육의 시대로 점철된 시대기도 했다. 수천만 명의 사상자로 가족을 잃었고 포로수용소나 강제 수용소를 통해 인간의 잔인한 실체를 경험했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과 기록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괴로웠다. 오래전 호기심에 일본군 731부대 마루타를 다룬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도저히 보기 힘들어 중도에 포기하고 나온 기억도 있다.
이 책을 이제야 본 이유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 읽은 '사색이 자본이다(김종원)'에서 저자가 추천하기에 용기를 냈다.
우리가 일회성인 인생을 살면서 알아야 할 삶의 가치, 실존의 의미를 깨닫게 할 책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저자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참담한 고통을 써 내려간 자전적 에세이뿐만 아니라 작가의 직업적 '책임감'을 살려 수용소안에서 '로고 테라피 신경학적 이론'을 창안해 냈고 훗날 책으로 완성시켰다.
이 책은 신경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교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은 회고록이다. 하지만 여느 회고록과 달리 대단히 차분하며 관조적이다. 극한의 궁지에 몰렸던 사람으로서 '나'의 주체가 아닌 제3의 눈으로 바라보는 듯한 표현들로 공포를 표현하기보단 초월함을 느끼게한다. 그것은 죽음의 길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항상 실패한 결과에 대한 반론으로 '어쩔 수 없었다'라는 변명을 앞세운다.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용기 있는 책임은 감추기 급급하다. 저자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살만이 유일한 자유라고 생각할 독자들에게 수용소에서 자살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고압전류 철조망이 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계산하고, 모든 기회를 감안해 보아도 보통 수감자들이 살아서 나갈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기에 아무런 보장도 없이 자기가 수많은 선별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 살아남을 극소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을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조차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 첫날 나치 장교의 집게손가락질(그날 기분에 따라)이 최초의 생사가 선별되었다는 글로 서두가 시작된다. 함께 들어온 사람의 90퍼센트는 가스실로 들어갔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를 포함해 3년 동안 4곳의 수용소를 옮겨 다니면서 끝까지 살아남았다.
첫 번째 행운이 있었을 뿐, 그는 이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매일같이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하고 젊어 보이려고 뺨을 문질러 혈색이 좋아 보이게 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여야 가스실로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용소 해방 몇 달전쯤에는 계단을 오르기 힘들 정도로 근육이 다 소실됐고 '살아야 하는 의미를 찾고자' 의지력을 총집결해야만 했다.
그것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미 때문이었다. 저자는 아우슈비츠에 처음 잡혀갔을 때 출판하려고 집필 중이던 원고를 압수당했다. 원고를 새로 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가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도록 했다. 발진 티푸스에 걸려 고열에 시달릴 때도 작은 종잇조각에 수없이 많은 메모를 하며 잃어버린 원고를 다시 쓰는 작업은 죽음의 위협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고백한다.
로고테라피(Logtherapy)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 '로고스 Logos'와 '치료'를 뜻하는 '테라피 therapy'가 합쳐진 것이다. 이 치료법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일깨우는 것, 인간이 스스로 삶의 의미를 대면하고 알아내도록 도와주는 기법이다.
그는 로고테라피(Logtherapy)를 창안하는 계기가 됐던 잔인한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과 만나게 된다. 그는 회고록뿐만 아니라 그가 창안해 낸 의학기법을 설명하고 실증성공사례를 수록함으로써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후세에게도 그 유용함을 전달하려 애썼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는 생존밖에는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무감각의 생활을 통해 오히려 자기 운명에 대해 냉정하고 초연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고 구원의 실체를 찾았다. 그리하여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한 곳에서도 자기에게 남아 있는 삶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쏟게 된다.
살아남은 자들의 원동력, 힘의 근원은 '내면세계의 극대화' 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살아남은 수용자들의 공통된 삶의 의지였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의지는 굶주림과 수모, 공포, 불의와 같은 분노의 감정도 삭힐 수 있었다.
그는 우울과 불안증세로 고통스러운 현대인들을 위해 로고테라피 기법을 제시한다. '비관 속에서 낙관'을 찾는 기법이다. 모든 정신적 불안과 고통을 해결하려면 원인을 찾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의미'와 '책임'을 하나로 엮었을 때 발현된다는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통에 남편을 잃었어도 어린 자식들을 위해 일어선 어머니의 책임감이라면 적당한 비유일 것이다.
실질적으로 그를 살려낸 '로고테라피'이론은 수용소만 아닐 뿐 정신적 고통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현대인의 고통스러운 내면의 큰 축은 '허무(체념) 주의'가 아닐까. 저자는 비록 현실 속 사정이 좋아질 확률상 천 분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치료시도를 포기하지 말라고 권한다. 치료에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 아닌 체념이다.
그는 포로수용소 내에서의 '체념'상태를 상기했다.
강제 수용소에서는 체념 상태가 아침 다섯 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물론, 밖으로 일하러 나가는 것도 거부하고, 대신 막사에 남아 똥과 오줌에 절은 짚더미 위에 누워 있기를 고집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아무것도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 경고나 협박도 소용없다.
그런 다음에 아주 전형적인 행동을 한다. 주머니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담배를 꺼낸 다음 그것을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그가 앞으로 48시간 안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없어지고, 순간적인 쾌락의 추구가 뒤를 잇는 것이다.
현대인으로 비유하면 체념은 '마약(또는 술)'이나 '게임중독'이 해당될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의 선택은 불안, 우울, 실존적 공허, 고독, 권태, 월요병 등 그로 인한 내면의 공허함을 순간적인 쾌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들과 다르지 않다.
로고테라피에서 치료는 내담자가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하는데,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돕는 과정에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책임감을 부여하고 스스로 치유토록 한다는데 의미가 크다.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한 어떤 태도를 취하도록 결정을 유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별한 아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내담자에게는 시련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도와준다. 만약에 내담자가 죽고 아내가 살았다면 그 슬픔을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지금의 시련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돕는 것이다. 즉 시련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의미기법이다.
개인적으로는 '역설의도' 기법을 상당히 흥미롭게 읽혔다. 그것은 마음속 두려움을 역으로 당당히 맞서 새로운 소망으로 해석시키는 기법이었는데, 긴장하면 이유 없이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이라던가, 말을 더듬는 사람이라던가, 글씨가 교정이 잘 안 되고 악필로 쓰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완벽하게 망쳐버리라고 제안한다. 예를 들어 땀을 더 많이 흘리겠다라던가, 말을 더 심하게 더듬어 보겠다라든가, 식으로 말이다. 지나친 주의집중을 역으로 이용하면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아프지 않으면 건강한 것이고,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라는 법륜스님의 강연이 생각이 난다. 많은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것 하나만은 알 것 같다. 내가 힘든 것에는 분명 삶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은 내 선택이 아니라고 방종하듯 사는 것은 답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수동적인 삶은 안 된다. 알 때까지 치열하게 사색하고 내 삶의 답을 찾아보자.
로고테라피 치료는 삶의 의미를 발견해 주는 것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다. 스스로 가치판단을 하게 함으로써 삶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하기에 미래에 대한 추상적인 제안은 거리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기에 저자는 역으로 확실한 내담자의 과거를 소환한다. 그리고 그 제안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