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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틈에서 숨 쉬다 온 서울숲

결혼기념일에 드는 생각들



사랑에 빠져서 연애편지를 읽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읽는다.  그들은 단어 하나하나를 세 가지 방식으로 읽는다.  그들은 행간을 읽고 여백을 읽는다.  부분적인 관점에서 전체를 읽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부분을 읽는다.  문맥과 애매함에 민감해지고 암시와 함축에 예민해진다.  말의 색채와 문장의 냄새와 절의 무게를 곧 알아차린다.  심지어 구두점까지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해 내려한다.


- 독서의 기술 / 모티머 애들러 中




나의 젊은 시절엔 지금처럼 휴대폰도 없었고 집집마다 전화도 별로 없던 시기였다.  유일하게 직접 전달할 수 있는 편지에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보냈다.  그렇게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전달받기도 하면서 2년간의 연애를 거쳐 드디어 결혼을 했다.  지금은 문명의 발달로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 표현을 하고 쉽게 연애하고 사랑하는 과정이 있지만 어찌 되었든 상대를 알아가는 신중한 연애기간은 꼭 필요하다.  



그렇게 선택한 결혼임에도 살면서 회의감과 실망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결혼은 남편 하나만을 만난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깊게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시월드와 시작된 신혼은 확실히 고달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시간들을 만나면 나를 먼저 이해시키는 습관이 있다.    



나의 결혼의 목적은 평화롭고 행복한 가족 만들기다.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헤어지지 않고 지금껏 살펴본 남편에게서 진실되고 깊은 사랑과 우정을 느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因緣이란 말처럼 나와 남편의 인연은 우연히 필이 맞아 연결된 끈이 아니라 오랜 시간 겁의 인연을 거쳐 만나게 된 것일 테다.  



남편이 홀로 세상에 떨어져 나온 사람이 아니듯이 남편이 자라온 과정 속에 있는 시댁사람들을 한 번 무조건 수용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남편에 이은 두 번째 적극적 읽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들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내 인생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렸음을 직감하기도 했다.  그것은 단념이 아니었다.



이제는 시어머님도 세상을 떠나시고 시댁 형제들도 각자 자신의 삶 속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며 살고 있다.  잘 견뎌냈고 잘 보내드렸다는 생각에 홀가분한 마음이 크다.  





어느새 결혼한 지 34년이 되었다.  매년 나는 아이들에게 엄마아빠의 생일보다도 결혼기념일이 너희들에게 더 중요한 날이라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엄마아빠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이들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결혼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결혼은 제2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큰 아이는 독립해서 천안에 내려갔고  작은애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어서 진실된 짝을 만나 평화로운 가족을 만나 정서적 안정을 가지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다.  남편이 결혼기념일마다 무엇을 먹고 싶냐고, 무엇을 가지고 싶냐고 묻는다.  나는 매번 이쁜 꽃만 있으면 충분하다말한다.  아이들이 엄마가 좋아하는 꽃바구니와 케이크를 사 올 것을 알고 있었다.



남편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뚝섬에 위치한 서울숲으로 데리고 갔다.  서울숲은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숲 형태의 광대한 공원이다.  고급 고층 아파트가 떡하니 위치해 있고 한강과 중랑천이 공원 근처를 흐르는 곳이다.  문명과 자연의 타협점이 잘 갖춰진 곳이다.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서울숲에는 튤립축제가 한창이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탄성이 들렸고 단숨에 모두들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자연 안에서 숨 쉬고 산책하고 때론 주체할 수없이 좋아 떠들어도 너그러이 이해하고 만족할 수 있다.



오래 살진 않았지만 인생의 행복은 많은 소유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고통을 묵묵히 견디면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은 소중한 가치의 소중함을 얻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지혜였다.  너무 흥분할 필요도 없고 너무 낙담할 필요도 없다.  꽃을 보면서 잡념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것 만으로도 행복을 취할 수 있다.



하늘 사이로 먹구름들이 위엄 있게 서울숲을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도 서울숲 생태공원을 모두 돌아보지 않적당한 미련을 남긴 채 돌아왔다.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기념일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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