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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아이들에게

 너희들을 만나 얼마나 다행인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죽음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존재다.  

죽음을 의식하고 앞서 나아가 준비한다.  

그래서 공포를 느끼는데, 그 때문에 더욱 본질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시간의 유한성이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인간다운 삶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 '존재와 시간 - 하이데거'




장수사회가 된 현대에서 의학발달로 인해 우리는 옛날 사람들보다 분명 평균 수명이 길 테지만 불확실한 삶 속에서 무슨 일이 닥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들은 의외로 본인의 불의의 사고에 대해 미온적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죽음이 닥치기 전에 넉넉한 사전 경고시간을 줄 거라는 믿음이 있거나 생각조차 하기 싫은 두려움 때문이리라.  하지만 조금만 감정을 자제하면 이성적 판단을 우리는 내릴 수 있다.



나는 삶의 종료가 임박하기보다 다소 건강한 시기에 가족들에게 심리적 결재를 어느 정도 완료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예전부터 오륙십대가 추상적으로나마 적당하지 싶었다.  인생의 전환점인 오륙십 대는 전반전에서 후반전으로 넘어가는 하프타임 시기다.  



후반 인생이 펼쳐질지 모를 시간을 대비하여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안전장치를 점검함으로써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평화롭게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고 본다.



다소 무겁고 우울한 이야기 일수도 있는 사안을 다소 건강한 시기에 거론하면 닥치지 않은 미래의 순간들을 우리 모두 꽤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장소를 나는 집이 아닌 여행지에서 가볍게 시작하길 권한다.  


미래의 이야기이기에 추상적일 수밖에 없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나눈 낯선 이야기는 오히려 가볍게 수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들에게는 생전유언과 같은 의미로 들릴 이야기들은 새로운 공간의 추억과 함께 차지하게 될 것이다.  



남편과 나는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 짐이 되지 았는다는 안도감 외에도 노년의 질병에 대하여 재해를 준비하는 마음처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다.  



각종 보도통계치를 살펴봐도 노인환자가 사망하기 3개월 전에 의료비 지출은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크다고 한다.  사망을 앞두고 행하는 의료치료는 회생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연명의료 비용으로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힘들게 할 뿐이다.  



우리 부부는 자신의 연명의료 중단의사를 밝히는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를 등록할 것을 서로 합의했다.  이는 가족을 위한 애정이기도 하지만 나의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기회기도 한 셈이다.  유사시 최선의 선택을 미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며칠 전, 34주년 결혼기념일에 아이들이 꽃바구니와 와인을 사 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꽃바구니에 달린 리본문구를 보면서 웃음이 터졌는데 결국 우리가 소유한 가장 귀중한 자산은 돈이 아니라 함께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이 있어서 서로에게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고마운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강의 흐름은 멈추는 걸 모른다.  우리는 늙고 아이들은 우리의 자리로 올라설 것이다.  아이들의 보호자였던 우리가 아이들이 우리를 보호하는 위치로 바뀌게 된다.  또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최선을 다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기억이 멈추는 시간들이 올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우리는 타협할 것과 집중할 부분을 가려낼 줄 알아야 한다.  젊은 시절처럼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타협하고 자신의 체력에 맞춰 집중할 부분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삶이 편안하고 유연해진다.



포르투갈어 시 중에 나이 들어가는 부모가 자녀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꽤 유명한 그 시를 읽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왔다.  성숙한 어른으로 살다가 깔끔하게 가고 싶지만 예기치 못할 상황도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지만 그것은 내 뜻대로 삶이 흘러갔을 때 일이다.  



어찌 되었든 나이가 들면 자식들의 도움을 받고 신세 지는 일이 늘어 갈 것이다.  육체적으로 끝까지 자립하기 어려운 시기에 올 때 이야기다.  하지만 미리 들려주어도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한다.  유한한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 테고 그만큼 부모를 존중하고 가치 있게 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아이들에게


나이 든 내가 지금까지의 나와 다르다고 해도

부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해 주렴

내가 옷에 음식을 흘려도

신발 끈 묶는 법을 잊어버려도

네게 여러 가지를 알려 줬듯 지켜봐 주길 바란다


너와 말할 때 똑같은 얘기를 여러 번 되풀이해도

부디 막지 말고 고개를 끄덕여 줬으면 해

네가 졸라서 거듭 읽어 줬던 그림책의 따뜻한 결말은

늘 똑같아도 내 마음을 평화롭게 해 줬어


슬픈 일은 아니야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여도 내 마음에

격려의 눈빛을 보내 줬으면 해


즐거운 한때에 내가 무심코 속옷을 적시거나

목욕하기 싫어할 때는 떠올려줬으면 해

너를 쫓아다니며 몇 번이고 옷을 갈아입히거나

온갖 이유를 대며 싫어하던 너와 함께

목욕했던 그리운 날을


슬픈 일은 아니야

먼 길을 떠나기 전 준비하는 내게

축복의 기도를 해 줘


머지않아 치아도 약해지고 삼키지도 못하게 될지 몰라

다리도 쇠약해져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되면

네가 연약한 다리로 일어서려고 내게 도움을 청했던 것처럼

비틀거리는 나를 부디 네 손으로 잡아 줬으면 해


내 모습을 보고 슬퍼하거나

스스로가 무력하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너를 꼭 안아 줄 힘이 없다는 건 괴롭지만

나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마음만은 갖고 있길 바라

그것만으로도 분명

나는 용기가 솟아날 거야


네 인생의 시작에 내가 곁에 있어 준 것처럼

내 인생의 마지막에 조금만 곁에 있어 줘

네가 태어나 내가 받았던 수많은 기쁨과

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갖고

웃는 얼굴로 대답하고 싶어

내 아이들에게,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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