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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이션을 보다가..

이젠 착한 사람이 되지 않을 거야


'착하다'라는 단어는 겉으로는 따뜻해 보인다.  남을 위로하고, 분위기를 잘 맞추고, 유연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하니까.  하지만 다른 방향에서 보면 남을 위해 나를 버리는 폭력적인 단어로도 느껴지기도 한다.  틀에 가둬놓고 눈치를 보게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나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

착한 사람으로 살라는 말을 오래 듣다 보면, 나를 나로 바라보지 못하고 '남이 바라보는 나'를 나 자신으로 여기게 된다.  착하다는 건 늘 남의 평가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시선이 무섭고, 남을 의식하게 되고, 남을 기준으로 두게 된다.

그래서 내 자존감의 높이는 타인에 의해 결정이 되고, 곁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내가 달라진다.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_ '빨강머리 앤, 행복은 내 안에 있어' 中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형제가 많은 가정일수록, 자신의 특기가 없이 평범할수록 부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생존본능으로 유순한 아이가 선택하게끔 되어 있다.  이른바 샌드위치로 부모의 관심 밖의 위치에서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가운데 아이가 많다.  


나는 위로 두 언니가 있고 밑으로는 남동생이 있다.  어려서부터 눈치껏 행동하지 않으면 혼나기 일쑤였고 보호받지 못했다.  엄마 말을 잘 들어야만 칭찬을 받았다.  유년시절 특히 나를 외롭게 한 것은 부모님의 애정이 남동생에게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착한 아이였어도 넘지 못할 벽으로 느껴졌다.  '빨강머리 앤, 행복은 내 안에 있어(조유미 저)'에는 이런 글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즐거워도 내가 즐겁지 못하면 그것들조차 노동이 된다.


내가 '착함'을 성토하는 이유는 '좋은 사람'이라는 명제가 자기 착각이기 때문이다.  착함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방향이었을 테지만 헌신의 방향이 내가 아닌 남을 향했을 때는 그들은 권리로 이용할 뿐이다.  착한 사람은 일상에서 조금씩 눈치가 보였을 테지만 애써 정신승리로 자신을 위로하며 다독였을 것이다.  


그러니 타인의 중요도에서 나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예전의 내가 그랬다.  부모도 형제들도 선생님도 지인들 모두 착하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위안이 되었고 그것이 '나다운 것'이라 믿으며 성장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나는 그럴수록 외롭고 힘들었다.  어른이 되고 중년이 다 되어서야 힘든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를 홀대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옥죄고 있었다.


지금도 '착하다'라는 것에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졌다.  상대가 감사한 마음이 없이 착함만을 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호구로 볼뿐이란 점이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는 끈 떨어진 연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방황했다.  허탈하다는 표현이 적절할까.  지금은 감정의 선이 그어진 상태에서 안정을 찾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꿈틀대는 슬픔은 여전하다.


바쁘다는 핑계로,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금전적인 이유로 병든 엄마를 내가 케어해야만 했을 때 형제들이 내게 믿었던 것은 '착함'이었을 것이다.  그런 형제들의 이유가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나는 그저 병든 엄마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엄마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뒤에 형제들은 완전히 흩어져 버렸다.  그들은 여전히 바빴고 거리가 멀었고 돈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  


친정엄마를 혼자 케어하기 너무 힘들어 하나뿐인 아들 좀 부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네가 있는데 바쁜 애는 부르니?'라고 순간적으로 반응하셔서 많이 놀란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허리복대를 하고 있었다.  언니들은 편하지 않다며 부르지 않으셨다.  나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꺼져가는 불씨가 분명히 보였는데도 형제들은 덤덤히 반응했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시자 그렇게 바쁘다던 형제들은 바로 모였고 자신들의 조문객을 슬픈 얼굴로 맞이했다.  


이젠 정말이지 착하게 살고 싶지 않다.  상대가 감사한 마음이 없다면 중단한다.  그것은 상호 간의 정신적 불균형 상태기 때문이다.  착해 지려기 보다 고마운 존재가 되고 싶다.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분과 동기가 확실하지 않으면 움직이고 싶지 않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온전히 나에게만 필요한 것이며 누구의 인정이 아니다.  


어버이날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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