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이 여행의 경험 자체가 스스로의 가치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돌아온 후 한동안은 영혼을 빙하 위에 두고 온 듯한 허탈한 상태에 빠져 있기도 했죠. 그런 내면의 변화등을 이유로, 출발 전에 진행하던 앨범용 작품 대부분을 폐기하고 뉴욕으로 돌아가 다시 새롭게 작업하기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수록된 열두 곡이 한 폭의 커다란 산수화로 보이는, 전체적으로 고요하고 평온한 톤의 작품이 완성된 것 같습니다.
- 그린란드 필드 레코딩의 성과들이 담긴 'Out of Noise' 후일담 中
2023년 71세라는 짧은 생을 끝으로 우리 곁을 떠난 사카모토 류이치의 자서전 격인 책이다. 그는 최초 2014년 발견된 중인두암은 치료가 되었으나 2020년에 직장암 진단을 받는다. 치료와 항암제가 차도가 없었고 이후 직장암이 간과 림프에도 전이가 된다. 2021년 직장과 간의 두 곳과 림프에 전이된 암을 제거하는 외과 대수술을 받았다. 대장을 30센티미터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지만 시한부선고를 면치 못한다.
선고 이후 그는 유한한 삶을 초연히 받아들이게 된다. 뼛속 깊이 음악인이랄까. 오로지 마음을 쏟을 일은 음악밖에 없어 보였다. 대수술 이후 심각한 섬망증세를 겪었고 합병증으로 13킬로그램이나 빠지고 면역력이 저하되고 먹어야 할 약이 산더미인 상태에서도 음악에 온통 마음을 쏠렸다는 그의 고백을 읽을 때는 진정한 아티스트라고 생각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마지막 앨범을 녹음했고 2022년 1월에는 인생 마지막 피아노 솔로 콘서트도 열었다. 가족 중 한 명이 사후에 그는 남들의 세 배는 살았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가 살아온 70십 평생 시간의 농밀함을 떠올리면 전혀 이상한 말이 아니란 생각마저 든다.
예를 들어 <타임>의 발표를 앞두고 온라인으로 다카타니 시로 씨와 세부 조정을 상의하던 시간, 그 시간만큼은 우울한 병실 안에서도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신기할 정도였죠. 음악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마지막 황제 1987년'과 '남한산성 2017년'의 영화음악은 기억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알고 있는 음악 중에 사카모토 류이치의 작품이 있을까 찾아봤는데 이 두 영화작품이 유일했다. 우연일지 모르겠으나 '남한산성'은 청나라가 막 시작되었을 때의 이야기이고 '마지막 황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그린 영화다.
'마지막 황제'에서 후궁이 집을 뛰쳐나갈 때 흐르던 '레인(Rain)'은 배우의 감정과 영화의 흐름이 정확히 표현되어 세련된 긴박감으로 넘쳐흐른다. 임팩트 넘치는 이 음악을 책에는 2주일 만에 완성되었다는 후일담 이야기도 있는데 짜릿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대단한 작곡가란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 시간이었다. 지금도 예능프로그램의 반전음악으로 자주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이 영화로 아시아 최초 OST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다.
또 영화 '남한산성'은 역사적으로 슬프고 암울함을 다룬 만큼 한국인에게서 느끼는 촘촘한 분노와 한을 폭발시키는 감정의 음악이 필요한데, 그는 현악기와 피아노 이외에 아쟁과 피리 등 전통 민속악기를 사용해 완벽히 구사했다. 영상에서 빠질 수 없는 음악은 다양한 긴장과 이완을 적절히 배합하여 스토리를 이끌고 감정의 몰입을 극대화시키는데 그는 최적화된 뮤지션이 아닐 수 없다.
영화음악에 특화되었다는 평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리 주제가 정해져 있으면 주어진 공간 안에 소리를 두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시된 문제를 보고 이 곡은 19세기 낭만파 스타일로 만들어야 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전기가 좋을까 중기가 나을까, 등을 우선적으로 따진 다음 베토벤, 슈만 등 구체적인 작곡가들을 떠오리며 어떤 느낌을 따라가는 것이 유리할지 판단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한 파트에 20 소절을 넣을지, 40 소절을 넣을지 틀을 정하면 자연스럽게 요구받은 곡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제가 영화음악에 특화되었다는 평을 듣는 것은 어쩌면 필요에 따라 이런 구축적인 접근도 가능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가 평생 함께 했던 음악적 재능은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략 전자음악 그룹 YMO(Yellow Magic Orchertra)가 추구했던 팝과 로큰롤 기반의 전자음악에 클래식과 현대음악 요소를 가미하던 음악과 시공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의 날 것의 그 자체인 우주 속 하나의 개체 음악이다.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를 집필할 당시의 심경을 보면 그러한 감정을 따라갈 수 있다. 음악이 있기 한참 전의 애도 시대의 귀족들의 향락은 수면에 비친 달과 함께 하는 시간만으로도 편안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을 거란 상상이었다. 그는 2015년 요양차 구입했던 하와이의 주택에 있던 100년 된 피아노를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실험'이라는 개인적 사유만으로 뉴욕의 자택의 마당에 오래된 피아노를 그냥 몇 년간 마당에 방치한다. 피아노는 몇 년의 시간 동안 수차례 비바람을 맞으며 도장이 벗겨지고 결국 본래의 나무 상태로 가까워진다. 인위적인 작업을 멈추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는 음악으로써 진정 자유롭게 살다 간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하다는 단순한 사실과 결론을 일찍 깨달았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특화된 생산성을 내놨다. 엄청난 노력과 시장감각을 가지고 세상의 콘텐츠를 분석하고 트렌드와 니즈를 파악해 제작사에 제공했고 성공했다. 내가 멋지게 보였던 부분은 그렇게 얻게 된 명성을 음악에만 국한하지 않고 공인으로서 대중의 앞에서 양심을 외면하는 국가에 대한 쓴소리를 하는 사회적(환경적)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한 사람의 생애를 펼쳐 보았을 때 존중하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와 '대중'을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했을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던 음악과 상통하는 그의 행보는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들으라는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 후반부를 장식하는 음악은 공간 안에 소리를 두고 갈 수밖에 없는 구속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주제 밖의 소리들의 외침이었다. 나는 감히 음악이 되지 못한 것들의 음악을 찾아내는 자유로움이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본다.
그의<Out of Noise>에는 이러한 그린란드 필드 리코딩을 할 당시 그린란드 여행의 북극권을 경험을 동물적 관능으로 돌아간 듯 보인다. 그는 자연이라는 위대함을 숭고함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나는 사진으로나마 그의 충격과 음악인생의 전환점을 이해한다.
우리 인간은 문명 안에서 행복을 찾지만 종국엔 자연의 힘 앞에선 무력한 존재란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는 거대한 자연의 소리를 통해 인간의 무력감을 깨달았고 고요하고 평온한 톤의 사람으로 변모한다. 마지막까지 표현하고자 했던 음악이 되지 못한 것들의 음악은 진정한 귀 기울임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저는 오래전부터 '포멀'한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 감각이 해가 거듭될수록 더 강해지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저 싱겁게 피아노를 치곤 합니다. 하루에 몇 시간, 건반에 손가락을 올려 울리는 소리를 즐기는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충분하지 않나, 생각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