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나는 이미 탁발하러 나갔고 아잔 자가로는 아직 절에 있었을 때 한 사내가 한 손가락의 반을 잃은 상태로 우리 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사연인즉슨 사내가 자기 집 물소를 데리고 풀을 먹이러 가고 있는데 물소가 갑자기 겁을 집어 먹고 마구 달아나려 했다. 그런데 물소를 잡아 묶고 있는 밧줄이 사내의 그 손가락을 휘감고 있어 사내가 물소를 뒤로 당기는 순간 밧줄이 그만 그 손가락을 반 토막 내버렸다.
사내의 손가락은 피범벅이 되어 있어 아잔 자가로는 즉각 차에 올라타 사내를 병원에 데려다줬다. 이틀 뒤 나는 반만 남은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그 사건은 사내가 흥분해 들뛰는 물소 다루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는 물소를 놓아버렸어야 했다.
당신의 마음이 산란할 때도 같은 전략을 써야 한다. 그냥 놓아버리는 전략을. 산란한 마음을 억제하려고 하지 말라. 그 마음을 멈추게 하려 하거나 통제하려고 할 경우 그것은 더 사납게 들뛰어 다루기가 더 어려워진다.
요즘 김주환교수의 '내면소통'을 읽는 중인데 워낙 벽돌책이기도 하고 숨 고르기를 해야 하는 내용들이 많아 더디게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유도하는 것은 마음근력(명상)의 중요성이란 것은 분명하다.
현대인들이 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명상은 그렇지 않은데 아무래도 종교적인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명상은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종교들이 수행의 한 방법으로 발전시켜 왔을 뿐이다. 내면소통 명상은 종교나 신비주의와는 상관없이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쉽게 수행할 수 있는 훈련이라는 것이 그의 논리다. 명상은 인간의 삶을 실질적으로 전환시켜 주는 평화와 행복의 한 방편일 뿐이다.
현대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움직이는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의 이해관계 속에서 분주히 셈을 하며 유리한 위치에 서고자 바쁘게 산다. 이 책은 그러한 마음 근력(호흡 명상)을 내재화하여 경지에 오른 '아잔 브라흐마 스님'이 알려주는 삶의 지혜다.
우리가 마음이 산란할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죄책감'이 아닐까 싶다. 내가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할 것 같은 무게감 때문에 갈등하는 것이다. 그럴 때 마음은 어딘가로 내달려가고 싶어 하는 성난 물소로 비유할 수 있다. 성난 물소는 내달려가게 가만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 물소는 얼마 가지 않아 진정하고 주인이 오기를 잠자코 기다릴 테니 말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알아차림(배경자아)'이다.
같은 동작을 무수히 되풀이하다 보면 습관이 되듯이, 침묵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훈련도 거듭하다 보면 이마저도 마음습관이 된다고 스님은 말씀하신다. 결국 정통 선정수행을 통해서 얻은 결론이실 테다. '아잔 브라흐마'스님의 말씀은 명쾌함과 유머스러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경청한다. 책 속의 모든 이야기들 역시 우리들의 번잡한 일상에서 겪는 소란을 '사라지게 하는 법'으로 채워져 있다.
아잔 브라흐마스님은 마음이 산란할 때는 그저 그런 상태의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노력을 해보라고 한다.
자신을 운전자가 아니라 승객으로 생각하고, 뒷좌석에 앉자 운전에 관여하지 않고 여행하는 승객처럼 내게 일어나는 모든 온갖 현상을 관찰해 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자 입장의 수행감정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주는 감정이 주는 호들갑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기에 침착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즐거운 이유는 고통스러웠던 두 시점 사이의 휴지기에 불과했을 뿐이다.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이 맛있는 이유는 몇 시간 전까지 먹지 않은 시장기가 이유이며 이후 몇 시간 동안 먹지 않을 시간의 공백의 대가일 뿐이다.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고통도 없다. 뚜렷한 결론에 도달한다.
삶이 내가 기대하는 대로 결코 흘러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헛된 기대감으로 실망할 뿐이다. 집착을 놓아버리고 고요함의 평화를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 번뿐인 삶을 후회 없이 평화롭게 이어갈 수 있을까.
집착을 버리는 훈련뿐이다. 협상에서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과감한 승부수로 이기는 것처럼 놓아버리는 결단은 두려움이 없다.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스님은 우리 모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다는 표현을 쓰셨다. 결국 모두 죽음을 향해 가는 신세란 뜻이다.
암에 걸린 사람을 대할 때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보다 성을 덜 내거나 짜증을 덜 낼 것이다. 당신은 아파하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곧 죽으려는 사람에게는 연민의 감정을 품게 된다. 우리 모두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누구에게나 다 그런 감정을 품을 수 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하든 그저 그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