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당신은 생각한다. 그런 말에는 언제나 힘이 있었다고. 이건 여성 문제가 아니라, 더 큰 억압의 문제다,라는 식의 논리는 언제나 강했고 다수를 설복할 수 있었다. 정윤이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논의조차 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정윤은 수면으로 올려놓고자 노력했다. 정윤이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희영의 주제는 회의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 몫 中
최은영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나 자신을 만나게 된다. 글 속에 있는 주인공이 내가 되어 있고 주변 인물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고민의 무게와 통증과 슬픔이 고스란히 왈칵 내 곁에 도착하고야 만다. 글을 잘 쓰는 작가다.
2020년 젊은 작가상 수상작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와 함께 총 일곱 편이 수록된 단편소설집이다.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에는 거대한 자본주의 열차에 편승하려는 한국사회의 이기적 개인의 구조적인 치부를 여실히 드러냄과 동시에 핍박받거나 억압된 환경을 수용하는 사회적 약자, 여성, 노동자, 서민이 간신히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 차별이 당연하고 폭력이 묵인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를 양상 했지만 결국 이성은 자신에게 이로운 것은 추구하고 불리한 것은 회피하는 능력만 키운 셈이 되었다. 이기적 개인들은 사랑과 연대의 가치를 알 수 없기에 그들의 비판은 차갑기 그지없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편을 강조한다든지, 노동 유연화 정책을 옹호하는 식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소설엔 용산참사(2009년 1월 용산 철거현장에서 발생한 사건)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아니고 어딘가 특별하거나 특출한 사람도 아닌 시민들은 저항도 못하고 타의로 용산을 떠나게 된다. 용산에 터를 잡고 살았지만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떠난 영문과 여자강사와 수강생인 희원의 이야기는 사회적 사건의 묵인은 결코 삶에 대한 태도에서까지 자유롭지 못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中
소설의 첫 막을 연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시작으로 작가는 글쓰기로 인해 자신을 삶과 당당히 만나는 시작이 됨을 보여준다. 수강생이었던 '희원'은 희미한 빛으로나마 가슴으로 연결되어 있던 여자강사의 발자취를 쫓아 대학원에 들어간다.
'몫'이란 소설 역시 '글쓰기'의 영향력을 알지만 재능의 부족을 깨닫는 '해진'의 이야기이자 우리들의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녀는 동갑내기 '희영'의 유려한 글쓰기에 압도되어 대학의 교지 편집부에 들어가 열심히 참여하고 노력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글에 담겨있는 힘과 전달력의 중요성을 배우는 과정이 얼마나 필요한지 목도하게 된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대변을 해주는 기자는 글쓰기의 재능 외에도 다수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연관성을 찾아내어 연대의 힘을 내도록 구심점을 찾아야 비로소 빛을 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해진은 대학원에서 일어난 교수 성희롱 사건을 분석하는 글을 쓰겠다고 말하지만 김영삼 정권 말기 공권력 남용 문제를 취재한 지면과 어긋난다며 내부에서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이때 선배 정윤이 일개 여성 문제가 아니라 대학원 사회의 기형적인 권력구조에 관한 문제로 지지하자 지면에 실게 된다.
글쓰기는 자기 확신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 글이 확장성을 가져야 비로소 글로서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재능이 남달랐지만 용옥, 정윤, 희영은 모두 편집실을 떠나고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던 '해진'만 남아 글을 꾸준히 쓰고 사회부, 정치부 기자를 하는 마무리는 의미가 있다.
글 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 몫 中
당연한 사회적 분위기, 당연한 사회적 구조체제에서 인간은 온전한 혼자가 되지 못한다. 나누지 못하고 진심을 숨기고 그저 괜찮다고 자신을 애써 위로할 뿐이다. 이때 가장 의지가 되는 곳은 가족이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 본성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따뜻해야 할 가정이 가부장제의 답답하고 억압된 구조이고 한국사회의 묵인이 보편화되던 가족주의가 이끌던 시기라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답신'과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소설이 그렇다.
'답신'에는 그 시대의 묵인하는 폭력남편이 있고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는 입양을 보내 식모살이를 하는 자식을 당연하면서도 냉정하게 바라보는 가족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자주 없는 풍경이라고 안심해야 할까. 상황이 달라졌을 뿐 미디어로 은폐되고 치밀하게 변질되었을 뿐이다. 단지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작가는 어떤 방법으로든 외면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것은 관심을 표현하는 최소한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상대가 말하는 사람의 표정과 음성 안에 떨리던 악센트 속에서 변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전의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타고난 관찰력과 자기 생각을 끝까지 끌어가는 용기,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지력을 가진 동기의 발표를 들으며 주인공은 기자의 꿈을 가지게 되고, 사랑하는 언니가 형부의 매질을 당할 때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휘둘리는 겁쟁이로 생각했지만 언니의 사랑으로 자랐음을 감옥을 나와서야 깨닫고, 식모로 자란 자신이 홍콩의 딸네집 있는 식모를 함부로 대하는 딸을 볼 때 무심히 볼 수 없듯이 관계의 밀도의 체험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독자들은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읽고서 어떤 과거의 나로 더 이상 돌아가지 못할까..
우리는 강자에게 복종하지 말고 약자를 억압하지 않아야 한다. 약자를 돌보는 것이 자유인의 자긍심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돌봄이 필요한 존재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억압된 체제에 편입하기보다 힘든 체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인간적 유대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 지 알아야 한다. 남들에 의해서 사라지는 삶, 종속당하는 삶, 능동적인 순종은 이기적인 개인의 먹잇감일 뿐이다. 나의 힘을 기르고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