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칼럼니스트가 되기 전에 어머니는 자신의 가치가 뭔지도 모르셨다고요. 그게 뭔지도 모르셨다니까요! 그 점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는 마치 사회에서 노예와도 같은 기능을 수행하셨던 거예요. 보수도 받지 않았어요. 제대로 평가를 받지도 못했지요. 요컨대 어머닌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 어머니를 좀 보세요. 어머닌..."
여기서 앨리스는 흔들거리는 라일락 쪽을 가리키면서 표현을 찾았다.
"어머니는 뭐랄까, 진정한 사람이 되신 거예요."
'스톤 다이어리'라는 이 책은 주인공 '데이지 굿윌'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팔십여 년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저자 캐럴 실즈는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한 사람의 인생을 순수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소설'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또 소설이야말로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볼 수도, 앞으로 살아갈 삶의 강물도 덤덤히 유영할 용기를 주기도 한다. 소설의 매력 중에 하나다. 이 소설도 그 대리경험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라 장담한다.
데이지의 아버지 '카일러'는 데이지가 탄생하기 전까지 아내의 임신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비만 때문이었고, 데이지의 엄마는 자간(분만 시 배설되지 않은 독소로 인해 온몸에 퍼지는 병)으로 데이지를 낳다 죽고 만다.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카일러는 아내의 친구인 '플랫부인'에게 넘겨지게 된다. 플랫부인은 카일러부부의 결혼생활에 비해 자신의 부부생활에 늘 비교되어 왔던 차에 과감한 결단을 내리게 된다. 데이지를 데리고 생물학교수로 있는 아들 바커를 찾아간 것이다.
바커는 핏덩이를 안고 온 엄마를 당연히 처음엔 이해를 못 하지만 식물학자인 그의 밑에서 꽃처럼 아름답게 자라는 데이지를 보며 어느 순간 소수성애를 느낀다. 데이지는 첫 번째 결혼 실패 후 20살이 넘는 나이차이임에도 바커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는 세 명의 자녀를 낳았고, 당시의 시대상인 현모양처로 남편에게 모든 기준을 맞추는(성관계에 대해서도) 아내로 산다. 하지만 바커의 사망 후 그녀의 삶은 원예에 관한 기고를 하는 일을 하며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날, 다른 정직원에 의해 일을 뺏기고만 데이지는 급격한 분노와 우울증을 경험하며 고독한 삶을 맞게 된다. 이때부터 그녀는 급격하게 늙어간다.
삶의 기운을 잃은 데이지는 증손녀 빅토리아와 함께 그녀의 시아버지 매그너스 플랫의 흔적을 찾아 오크니제도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115살의 고령의 나이에 죽어가고 있는 매그너스 플랫을 만나게 된다. 시아버지의 찾아가는 그 시간을 통해 그녀는 마치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아 떠나는 듯한 기분을 경험한다.
이 소설을 읽는데 자꾸만 오래전 읽은 '스토너'가 떠올랐다. 그 소설 역시 주인공 '스토너'의 조용한 일대기를 그리고 있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스토너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의 권유로 미주리 농과대학에 입학한다. 스토너는 대학에서 새로운 문학의 세상을 만나게 된다. 그는 첫눈에 반한 '아디스'라는 여인과 서툰 결혼을 하고 결혼 후 히스테릭한 여인으로 변한 아내 아디스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불행한 결혼생활을 아무 말없이 순응한다. 불행한 가정환경이 빚은 고통은 고스란히 그들의 딸에게도 이어지지만 그마저도 그는 순응한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학문적 소통친구인 매스터스를 잃는다. 그의 학문적 정신지주였던 아처 슬론도 세상(전쟁)에 대한 경멸을 보인 채 숨을 거둔다. 또한 그가 몸과 마음(욕망과 공부의 일치)으로 소통하며 사랑한 캐서린도 대학의 정치적 관념으로 인해 떠나고 만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대학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는 자신에게 처한 억압된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래서 결국 그는 동료들로부터 '헌신적인' 교육자로 불린다.
그는 학문에 대한 지론만은 고집스럽고 집요한 농부처럼 대한다. 그는 자타가 인정한 훌륭한 교사였음에도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각 때문에 항상 고민을 했고 그 고민은 습관이 되어 죽은 아처 슬론교수처럼 종국엔 구부정한 어깨로 변한다.
사람이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 어른이 되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 들어가고 있다. 아직까지는 건강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노환이 심하게 올 것이고 자연의 순리대로 삶을 거둘 것이다.
'스톤 다이어리'나 '스토너' 속 주인공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나는 나의 삶을 반추하게 되고 앞으로 진행될 나의 미래를 잠시 추측하며 숨을 고르게 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수많은 주변의 판단들을 뚫고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찾아가는 여정이다. 관습과 관계 속에서 꿋꿋이 내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우리는 주변의 수많은 관계 속에서 흡수되고 고립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순응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더 이상은 받아들이지 못할 저항선이 오거나 자신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순간이 와 멈출 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내 가치관을 만나는 시간이 온다. 내 안의 영웅을 만나는 순간이다. 좀 더 확장해 생각한다면 니체가 말하는 인간의 정신단계의 마지막인 '어린아이'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될까.
그 가치관은 혼자인 자신을 지탱해 주고 위로해 주는 버팀목이기 때문에 양보할 수가 없다. 그 버팀목이라는 정체성을 만나기 위해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그들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데이지'에겐 신문 칼럼니스트시절이었고 '스토너'에겐 학문에 대한 양보할 수 없는 지론이었다.
끝으로 스톤 다이어리란 이 소설이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는 주인공의 정체성을 찾는 데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타인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즐겁게 쫓아가도록 돕는다는 점을 들겠다. 독자인 우리는 저자의 노련미 넘치는 필체에 안내되어 주인공의 정체성을 수월히 찾을 수 있다.
저자는 1인칭 자선전의 입장에서 글을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3인칭으로 서술되어 객관화 만든다던지, 그녀와 주고받은 10여 년의 편지들을 공개함으로써 시간의 공백을 뛰어넘어 소설의 전체 구성을 이해시키는 엄정한 지성을 발휘한다. 한 사람의 일생을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입장(측면)도 고려해서 풀어놓은 책이 없던 걸로 기억한다. 소설의 반전, 재미, 나를 돌아보는 시간과 서사성을 두루 갖춘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