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한림원은 소설가 '한강'작가에게 대한민국 최초로 여성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우연히 TV를 보고 있다가 수상발표에 놀라 입을 떡 벌어졌다. 한국 문학역사상 기념비적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 국제적으로 부커 상을 비롯해 국제문학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지만 기존에 수상자 나이대를 보았을 때 노벨문학상이라는 거대한 성역을 뚫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모두의 예측을 깨기에 충분했다.
수상 이후 보도매체에서는 연일 그녀의 수상과 관련한 작품과 연대기를 상세히 전달하기에 바빴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보니 역시나 그녀의 모든 작품이 품절되었고 예약을 걸라는 문구가 뜬다. 안 그렇겠는가, 번역본이 아닌 한글로 노벨문학상 작품을 순수히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나는 그녀의 작품을 모두 읽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다루는 문장의 흐름을 사랑한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노랑무늬 영원'이었는데, 자아 없는 일상을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별거 아닐 거라고 치부하는 삶의 파편들이 알고 보면 수많은 사연들과 찰나의 과거로 사라진다는 사실을 시처럼 굵은 문장으로 담담히 전달하고 있었다.
개인의 삶 속에 강렬하게 기억되는 이야기는 신체적 충격이 가장 농밀하게 담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건강한 공감 없이 밀봉되어 해결되지 않는 비밀로 은폐되어 성인이 된다. 미봉책은 해결책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체에 기록된 기억의 저항은 시간이 갈수록 극렬해지기 때문이다.
아래 '채식주의자' 소설 리뷰는 2016년 9월에 쓴 오래된 글이다.
수상의 기쁨을 조금이나마 보태고 싶어 올린다.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 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미안하게도 한강씨 소설은 오랜만이다. 지난 5월에 맨부커 국제상(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이 놀랐고(우리나라 소설이?)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엔 이 책이 발간된 지 9년이나 지났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어느새, 수상의 파급력이 지성인의 필독서가 된 것이다.
'채식주의자'를 읽고 나니 딱 들었던 첫 번째 감상은 '하루키 문체'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한강씨의 소설을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씨의 번역이 자유롭게 빛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국소설 특유의 억제된 표현과 문화 콘텐츠들이 말끔히 제거된 채로(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없는) 줄거리가 진행되었고, 단문장이지만 핵심만 간단히 표현하는 단어와 표현이 하루키라도 이렇게 표현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또 몽환적 느낌의 전달,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오가며 독자에게 괴리감에 대해 적응케 하는 능력도 묘한 공통점을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한국적인 게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억지나 다름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글로벌 독자들은 단순하고 핵심적인 표현에 상상력을 동원한다. 딱 한강씨와 하루키 같은 문장 스타일이다.
연작소설 3부작으로 구성된 '채식주의자'는 세 명의 관찰자 시점에서 한 여성(영혜)의 인생이 지니는 관점을서술한 소설이다. 한강씨는 각기 연재한 단편을 묶어 한 권의 소설로 완성시켰다고 고백했다.
첫 번째 '채식주의자'는 무미건조한 남편의 시선에서 바라본 영혜의 행동들이다. 자신이 평범하다고 느낀 남편은 평범한 여성을 결혼상대자로 선택해 결혼했고, 승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대부분의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영혜)가 갑자기 무서운 꿈타령을 하며 육식을 멀리하기에 이른다. 결혼 전에 답답하다며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행동과 맞물려 그는 아내의 행동에 점점 기이함을 느낀다. 처가에 요청을 하지만 오히려 장인의 불호령과 아내의 강한 거부가 부딪쳐, 급기야 아내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두 번째 '몽고반점'에서는 영혜 형부의 욕망을 다룬 이야기다.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있을 거라는 아내(영혜언니)의 이야기에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비디오아티스트인 그는 '인간과 짐승과 꽃을 교합'을 비디오에 담고 싶은 게 꿈이다. 사라지지 않는 괴물의 얼굴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꿈을 꾸는 영혜는 자신의 몸에 그려지는 나무에 해방감을 느끼고 형부와의 성교로 무서운 꿈에서 해방되지만 언니의 목격으로 형부는 구속되고 영혜는 다시금 정신병원에 감금되게 된다.
세 번째 '나무 불꽃'은 영혜언니의 시선이다. 두 번째로 정신병원에 갇힌 영혜는 이미 정신적인 복귀가 힘든 상태다. 스스로 자신의 몸이 나무가 되길 소망한다고 믿고 있다. 가족들이 모두 외면한 영혜의 병시중을 들면서 그녀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척이나 힘들어하면서도 동생을 책임지려 한다.
어른이 된 이후에 가족모임에서 유년시절이야기를 하다 보면 같은 장면을 가지고 다른 기억을 하는 것을 발견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기억이란 참 상대적이란 생각이 들곤 한다. 지난 그 기억 하나에도 각자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고집하고 상처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비슷하다.
어린 시절 영혜의 다리를 문 개를 죽이는 장면(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매달고 달리다 죽인)은 괴물로 변해 성인이 된 영혜의 꿈에 반복해서 나타나게 된다. 유년시절의 강하고 무서웠던 기억은 어떤 형태로든 회귀된다.
그 기억은 아버지에게도 있을 것이고, 언니도 있을 테지만 영혜처럼 강렬하진 않다. 그렇게 그녀의 유년시절 기억은 상처로 남아 잠재의식 속에서 분출되고 괴롭히는 것이다.
나 역시 지금도 가끔 힘들고 괴로웠던 유년시절 기억이 꿈으로 왜곡되어 나타난 적이 종종 있다. 하지만 꿈에 대한 해석과 성찰의 시간을 가지자 더 이상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돌봄이 필요한 존재다. 영혜언니가 가족의 입장에서 '막을 수 없었을까?' 하는 독백의 시간도 그런 의미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최초의 집단에서부터 인간은 사회적인 도덕관념을 배우며 자란다. 그만큼 가족이라는 집단은 인격을 형성하는데 인생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아이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이미 정해진 부모와 살며 생물학적 본능에 따라 애착 관계를 형성하려 노력한다. 부모의 불합리한 행동과 폭력적 언행 속에서도 애정을 갈구하고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성향이 유년시절 대부분 확정 지어진다는 사실을 주양육자인 부모는 깊이 명심해야 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라면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안다는 점과 공동체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정신적인 착란증세를 극복하지 못한 영혜와 개인적 욕망을 예술로 변명하려는 영혜 형부의 행동에 이해보다는 우울함과 답답함 그리고 분노로 채워지는 것도 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