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에서 1996년 9월까지 약 74년의 긴 시간 동안 아일랜드가톨릭 교회 산하이고 사회시설인 '막달레나 세탁소(Magdalene asylum)'에서 실제 있었던 인권 유린 사건을 모태로 다룬 소설이다.
이곳은 정부기관의 보호아래 세탁물을 위탁받아 처리하는 방식으로 운영된 곳이었는데, 이곳에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매춘부나 미혼모뿐만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 고아 소녀들도 대다수였다고 한다. 신의 보호아래 있어야 할 수녀원은 세탁소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무보수, 무휴일로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매질, 성추행, 미혼모 자녀들을 돈을 받고 입양을 보내는 등 감금하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이들의 인권을 철저하게 유린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모두가 공범이 되어 쉬쉬하던 비밀은 결국 1996년에 범죄가 밝혀지고, '막달레나 세탁소'는 문을 닫게 된다. 문을 닫기까지 그 피해자가 3만여 명에 달했다고 하지만 이들의 사과는 정부가 강제로 폐쇄하고 분노한 교황청이 배상요구가 있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들의 사과가 진정성이 없다는 것은 아직도 배상 문제에 있어서 공방 중이라는 점이다.
소설은 가톨릭 사회가 지배하고 있던 1985년대 아일랜드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내와 다섯 딸을 둔 '빌 펄롱'은 석탄을 팔아 근근이 살아가는 소시민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어느 날, 그는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하다 창고 옆 벌어진 문틈 사이로 엎드린 채 광택제 통을 놓고 바닥을 닦고 있는 지저분한 아이들과 마주치게 된다. 대문 밖으로만 나가게 해 달라 애원하는 아이들이 있고 그제야 수녀원과 그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놓인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는 깨진 유리조각이 촘촘히 박혀 있다는 사실도 발견하며 놀라게 된다. 은총이 가득해야 할 수녀원 안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 현장을 직면한 것이다.
며칠 후 석탄을 배달하러 찾은 수녀원 창고에서 밤새 추위를 떠는 학대받은 여자 아이를 발견한다. 여자 아이는 14개월 된 아이의 행방을 그에게 묻는다. 수녀원장의 태연한 대처와는 다르게 부자연스러운 여자아이의 행동에서 빌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빌 펄롱은 미혼모의 자식이다. 빌의 어머니는 하녀 신세로 살아가는 저소득층이었지만 '미시즈 윌슨'의 도움으로 내침을 당하지 않고 계속 일하는 은혜를 받았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아일랜드 정부의 손아귀에 잡혀 양의 탈을 쓴 막달레나 세탁소에 수용되어 학대를 당해야 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사소한 기억들을 회상하며 보잘것없는 자신이 이만큼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해 준 미시즈 윌슨과 정상적인 남자아이로 성장하게끔 도와준 네드의 선행과 세심한 배려의 결단이 있었기에 구원받고 비극적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빌은 크리스마스의 즐거움도 잊은 채 깊은 고민에 빠지다 몰래 수녀원을 다시 찾아 그 소녀를 데리고 나오는 사소하지만 대단한 결단을 실행에 옮긴다. 여자 아이를 구출함으로써 닥칠 불이익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결정이라 믿은 것이다.
소설은 상당히 짧은 분량이다.
하지만 '빌 펄롱'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 이입은 상당하다. 거대한 사회조직의 힘과 압력 앞에서 느껴지는 개인의 무력감은 모두가 같기 때문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압도되어 회피하고 침묵이 제공하는 안락함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마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 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위험을 동반하는 선한 행동, 즉 자신만의 신념을 취할 때는 소멸 직전의 양심을 깨울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한 신념은 '서로 돕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도달할 때다. 하지만 타인을 돌보려는 행동의 결정은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기도 하다.
여자아이를 구출하고 집으로 함께 돌아가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나는데, 우리는 최악의 상황이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장 아내와 다섯 딸아이의 삶에 지장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이 침묵아래 보호받는 '얼음덩어리 공동체'에 송곳을 댐으로써 스크래치를 일으켰음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대규모 규탄집회도 모두 사소한 외침의 행동으로 시작된다.
약 74년 동안 인권유린을 자행했던 '막달레나 세탁소'는 견고한 종교집단과 정부지원이라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철옹성처럼 굳건하던 곳이었지만 폐쇄가 결정되고 배상 소송이 이루어진 시기는 2002년 영화 '막달레나 시스터스'가 개봉되고 나서부터다. 이처럼 자신들의 이익만을 충족시키려는 잔인한 집단의 잘못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것은 거대한 조직이 아니다.
조직과 서열이 중요한 대한민국은 수직적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라 할 수 있다. 남들 눈에 띄는 외관적 지표가 중요성을 띄는 사회에서 사회적 위상이 낮은 개인의 힘은 갈수록 약화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느 순간 경쟁에 지쳐 일방적 순종에 길들여져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소설을 읽고 여러 가지 감정이 드는 것은 이처럼 사소한 개인의 결정일지라도 그 선택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분명한 것은 그 사소한 행동이 최악의 상황을 멈추게 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연민이든 정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든 타자를 돌보려는 개인의 사소한 선택은 외면하지 않은 공동체 윤리를 실행한 첫 사례라는 점이다.
삶에서 정답을 손에 쥔 사람은 없다고 본다. 삶은 어느 한 개인의 선한 행동과 그로 인한 울림이 나비효과가 되어 연대하고 외침으로써 실행된다. 그러니 개인의 행동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