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타인들

우리는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포 소리가 멎은,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침묵의 전선…… 무엇이 일어날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무엇이 다가오고 있다.  아아, 수천 마리의 까마귀 떼들이 날아내린다.  날갯소리가 소나기 같구나. 온통 하늘이 까맣다. 푸른 구멍, 하늘 구멍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구나!   수, 숨이 막힌다. 아, 저, 저 마구 날아올라 가는구먼! 눈알을 다 빼먹은 까마귀 떼들이 날갯짓을 하며 춤을 추고 있다.  눈알이 빠져버린 송장이…… 그, 그런데 살아서, 숨이 붙어서 팔을 휘젓고 있지 않느냐!





박경리작가는 그 시절 대부분 사람들이 겪었던 가부장적인 삶과 억압된 사회분위기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의 분노를 극단적 고독으로 흡수하며 성장했다.  그녀의 삶 속에 불행은 멈추지 않고 해방 후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남편과 아들마저 잃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드리우고 있는 불우한 불행의 그림자에 짓밟히지 않고 수많은 작품을 집필하며 당당히 전업작가라는 타이틀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무엇보다 박경리작가의 작품을 대변하는 것은 '토지'를 꼽을 수 있겠다.  동학농민혁명에서 광복까지의 파란 많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 역사기록을 남긴 '토지'란 작품 하나만으로도 한민족의 방대한 역사 기록의 가치는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박완서작가의 작품활동 시기(산업사회로 접어들고 경제 성장의 가속도가 붙고 유신 정권 독재가 고착화되던)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문학에 있어 여성의 위치가 소외되지 않도록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박경리작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 감정이 섞였던 것 같다.  불편하면서도 흥미로웠고 또 결론적으로 분명한 이유를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책을 덮었을 땐 당시 전업작가의 삶을 살아가던 박경리작가를 잠시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한국 소설사에서 부계문학이 완고하던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 앞만 보고 집필하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당시 장편 소설은 문예지나 신문에 연재되고 독자들의 반응이 좋으면 책을 묶어내는 것이 하나의 경향이었다고 한다.  이 소설 역시 1965년 4월부터 총 13회 '주부생활'에 연재된 장편소설을 출간한 책이며,  타계 16주기를 맞아 새롭게 특별판으로 출간하여 만나게 된 책이다.



자들의 반응을 쫓아 책의 출판 유무가 갈렸던 현실을 미루어 봤을 때, 아마도 적절한 치정과 가정불화를 섞은 재미있는 소재가 필요했을 거라 생각한다.  작가는 독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도입으로 소설의 극적 재미를 한껏 끌어올렸다.  



미모의 한 여인(문희)이 흥신소에 찾아가 자신의 남편(하진)이 저녁이 되면 반드시 몰래 찾아가는 곳이 어디인지 캐내 달라는 의뢰를 하면서 시작한다.  문희와 하진은 결혼 10년 차이지만 '타인들'처럼 지내는 부부다. 소설은 서사를 이끌어 가는 주변 인물들이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이들이 나타내는 현실 속 욕망은 소설의 재미를 증가시키기에 충분하다.  



남편(하진)의 동생(하영), 문희의 오빠(문영)와 올케(현숙), 남편을 좋아했던 과거의 여인이자 아내의 라이벌(경옥), 또 동생의 라이벌을 탐욕하는 오빠(문영), 베일 속에 싸여있다가 후반부에 등장하는 소녀(정애), 하영의 섹스파트너(미혜), 한때 아내를 사랑했던 선생님(염기섭) 등등



그런데 스토리에 비해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결론 도출에 더 장대한 스토리를 넣었으면 좋았다는 아쉬움이 들기에) 또 그들과의 관계에서 치러지는 사랑 없는 잦은 동물적 행위들과 세속적 욕망(돈)을 쫓는 행동들은 눈살이 찌푸려지게 만든다.  또한 소설에서만 맛볼 수 있는 기막힌 우연들이 너무 잦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운명론에 날개를 단 소설이라는 문학은 작가의 특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한 당시의 연재를 기다리던 독자의 흥분을 돋는 소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현재 읽어도 손색없는 구성과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한 소설이다.  전쟁은 인간성을 타락 내지 상실을 안긴다.  트라우마로 남아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트라우마의 깊은 상처는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의 치유는 우리 모두의 공감과 사랑이 필수다.  트라우마를 다룬 책을 읽어보면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동일시하는 그들에게 연민과 함께 끝없는 사랑과 공감을 통해 안아주고 치료를 도우며 조금씩 현실의 땅 위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전쟁은 이미 끝났음에도 개인은 여전히 전쟁 속에서 비극을 안고 산다면 얼마나 큰 불행인가.



결혼을 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또 함께 살아도 타인처럼 무늬만 부부인 사람들도 많다.  사랑의 결론이 결혼이고, 결혼의 선물이 아기의 탄생이 되는 자연의 섭리가 사라지고 있다.  사랑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기적 개인은 사랑과 연대의 가치를 알 수 없다.  사랑과 연대는 자발적 자기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희(아내)는 바닷가에서 엄청난 트라우마를 고백하며 울부짖는 하진(남편)을 안아주며 함께 운다.  그제야 남편은 해방감을 맛보고 아내를 향한 사랑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깊은 안도를 했던 것 같다.  


나는 사랑의 기본 가치는 '돌봄'이라고 생각한다.



<타인들 / 박경리 저>

매거진의 이전글 비하인드 도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