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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와 주인의 차이점

문제의 해결 역시 우리에게 달려있다




봄에 새잎이 돋을 때부터 이미 가을 되면 잎이 떨어질 것을 예측해야 합니다. 봄에 새잎을 보면서 그냥 감탄만 하면 가을에 낙엽이 질 때 눈물이 나는 겁니다. 새잎이 날 때부터 이미 낙엽을 예측했다면 눈물 흘릴 일이 없겠죠.


지금 현재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먼저 예측하고 그에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결과를 예측할 수 있으면 내가 결과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미리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니까요.



- 방황해도 괜찮아 / 법륜





여러분은 어떤 꽃을 좋아하세요.



제게 꽃은 화려함, 우대받는 행위, 존경, 축복과도 같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꽃을 생각하면 행복하고 기쁘고 좋았던 기억과 동행하지요. 꽃은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생일, 졸업식, 승진.. 이벤트마다 함께 해주었던 마음을 녹였던 아이스크림이었으니까요.



예전에는 이왕이면 화려하고, 이왕이면 밝고, 이왕이면 붉은기가 도는 꽃이 좋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선별의 의미가 없다고 느낍니다. 길을 걷다 아스팔트 사이에서 삐죽 튀어나오듯 자란 노란 민들레를 보았을 때, 그 집요한 생명이 이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봄이 오고 아파트 담장을 장식하는 개나리꽃을 보는데 유채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개나리꽃을 보면서 유채꽃을 상상합니다. 성산일출봉을 휘감고 바다와 하늘 사이에서 몽롱하게 피어있던 유채꽃입니다.



모두가 뜻을 함께 하며 외치던 그 자유로움이 어찌나 강렬하고 아름답던지. 구속받지 않는 당당한 자유랄까. 정의로운 주인의 자세로 당당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투력까지 갖춘 그들은 세상을 균형 있게 바라보라고, 힘든 시기를 겪더라도 농담으로 이겨내라고 유쾌하게 말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하나의 꽃 만으로는 약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연대하며 바람과 함께 한 목소리를 내는 합창은 웅장함 그 자체입니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이다(김종원 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노예와 자기 삶의 주인은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라고요. 현실적 고통인 문제의 상황이 닥치면 노예는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바라보며 이 불편한 상황을 해결해 주길 바랍니다. 주변 상황이 원하는 대로 되면 기뻐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원망하고 탓하기 바쁩니다. 하지만 주인은 문제의 상황을 자신에게 스스로 묻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고 행동합니다.



정의가 쉽게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요즘입니다. 선동적 언어가 소비되고 확산되는 정치문화까지 혼재되면서 비판적 논증과 대립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구성원 모두가 공동의 삶을 함께 걱정하고 정직하게 반대하고 생산적으로 숙의한다면 민주주의는 반드시 지켜진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시간을 견디고 결과를 위해 힘겹게 싸우는 아픔의 지불이 끝나면 더 단단해진 세상을 만날 것이라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탄핵 집회 현장은 유채꽃밭 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주인입니다.



작년 4월 서래섬 '유채 찬란 축제'에 갔을 때 한강을 끼고 펼쳐있던 유채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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