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경험하고 함께 해석한다
마음이 왜 그렇게 되는지 내가 모른다고 해서 마음이 그렇게 되는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자기 마음이 그렇게 되는 이유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은 편리한 결론에 안주하려고 놀랍도록 교묘하게 스스로를 속입니다. 자기 정당화를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잘못했으면서 타인이 잘못했다는 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지요.
- 나답게 산다는 것 / 박은미
인간은 봄을 찬양하게끔 진화한 것이 맞다. 많은 사람들이 5월의 숲으로 모여드는 것이 그 증거다. 잠겨있던 수도꼭지가 풀리고 호스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모두 빨아 들인듯 자라는 나무들의 싱싱한 모습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가지는 힘차고 잎사귀는 서로 경쟁하듯 하늘을 가린다. 이 상쾌한 봄날을 즐기는 사람들은 모두가 즐겁고 모두가 명랑하다.
주중도 부족해 주말까지 우리는 서울 여러 곳의 시민공원을 찾아 움직이느라 바빴다.
남편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움직이길 원하는 나의 약점을 세심히 배려해 준다. 주차장이 있어 이동이 편리한 공원과 적당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산책로가 있는 공원을 수시로 검색한다. 적게 먹어 빨리 시장기를 느끼는 아내를 위해 점심시간 전에 산책을 끝내주기까지 한다. 꽃을 좋아하는 아내 때문에 남편은 봄이 오면 참 바쁘다. 이제는 남편이 나가자고 하면 군소리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일어선다.
우리는 봄날이 오면 하루도 허투루 보내면 안 된다는 묵언의 합의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외출하는 우리는 봄처럼 가볍다. 지금의 편안한 일상을 갖고 싶어 오랜 시간 소망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상기한다. 젊은 시절, 동선을 아끼며 분주히 움직였던 고단한 시간들을 통과한 남편과 나는 서로의 증인이 되어 아껴준다.
나는 내가 태어나 익숙한 한국의 풍경을 사랑한다. 세계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어디를 가나 내가 오래 머무는 곳이 물과 푸른 산새라면 굳이 먼 곳을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나는 만족하는 기본값이 낮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기대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온다.
우리가 주중에 자주 들리는 서울대공원에는 호숫가를 기준점으로 빙 둘러 조성된 둘레길이 있는데 언제 가도 질리지 않는다. 조용하고 풍부히 흐르는 호수는 그들과 평생 함께하는 익숙한 나무들처럼 사계절 내내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안겨준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내가 나무가 된 기분이다.
코끼리열차가 지나가는 도로 주변에는 데이트하는 젊은이들과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들이 대부분이고, 호수를 경계로 조성된 둘레길에는 우리처럼 중년이상의 지긋한 연배가 느껴지는 사람들이 조용히 움직인다. 빠르게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세대와 조용히 시간을 즐기는 세대의 차이를 호수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지난 주말엔 아들도 합류해 매헌시민공원과 양재시민공원에 들렀다. 큰 이등변 삼각형의 지형처럼 생긴 자투리 공간을 공원으로 조성한 매헌시민공원은 작은 '서울숲 공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면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양재천이 흐르고 있다. '서울숲 공원'이 광대하다면 이곳은 그곳의 축소판처럼 울창하고 알차게 조성된 단단한 숲 같다는 생각이다.
공원 안에는 매헌윤봉길의사 기념관이 있다. 이번에 들렸을 때에는 광복 80주년 기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억상자'라는 제목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윤봉길의사의 삶을 알리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동행하면 뜻깊은 관람이 될 것으로 생각이 든다.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투사와 그의 후손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는 미래도 없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가볍게 점심을 먹고 양재시민공원으로 움직였다. 카페가 잘 조성된 곳이라는 유혹에 집으로 가지 않고 들린 곳이었다. 봄을 맞아 '양재아트살롱'이라는 서울시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푸른 숲과 함께하는 산책길을 끼고 문화예술을 즐기게 하려는 복합문화행사였다. 매헌시민공원이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든다. 살짝 지기 시작하는 장미터널을 지나 아기자기하게 소품들을 판매하는 행사거리를 구경하고 우리는 카페로 향했다. 어느새 한낮의 햇살이 따가워졌다.
산책을 하면 서두르지 않는다. 산책을 나선다는 의도와 행위에는 이미 심리적으로 무장해제가 되었고 논리적인 상태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홀로 걷는 산책은 명상은 물론 자신의 사유를 아무 방해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라면 상대와 함께하는 산책은 내밀하고도 진지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의 패턴을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 서로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한다는 안정감을 주는 상대라면 좋을 것이다.
혼자 생각할 때 우리는 나의 생각패턴을 알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편안한 상대와 대화를 할 때 자주 우리는 '내 생각에는'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내가 이럴 때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구나'라는 사고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의 생각이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에 속으로 놀라곤 한다. 타인에게 예리한 논리의 칼날이 나의 논리에는 자기 정당화의 논리에 갇혀 있었음을 알게 되고 내 특징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나라는 존재는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의 합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나와 현재의 나의 생각이 다를지라도 나의 존재는 변함이 없다. 각자의 해석 방식이 경험을 구성한다. 똑같은 경험을 했어도 각자의 해석이 낳은 기억이 다른 이유다. 편안한 상대가 좋은 이유는 상황에 정확한 해석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나에게 불편한 해석으로 치닫는 방향만큼은 막게 해 준다는 점이다.
산책길에서 우리는 서로가 다르게 생각한 경험들을 함께 꺼내고 이야기하면서 현재의 어른답게 다듬어 해석을 돕는다. 부부는 그렇게 함께 하지 않은 시간마저도 함께 하면서.. 닮아간다.
ps. 아래는 산책길에 담아 온 풍경들입니다.
1. 서울공원 호숫가둘레길
2. 매헌시민공원
3. 양재시민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