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남편이 1박 2일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어제저녁, 작은 애는 갑자기 내게 영화 데이트를 신청했다. 나는 어떤 영화냐고 묻지도 않고 바로 흔쾌히 승낙했다. 작은애와 영화 성향이 비슷하다는 오랜 시간 축적된 믿음과 엄마 혼자 저녁을 먹는 것을 미안해하는 아이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체결되는 완벽함에는 설명 없이도 건너뛰는 이해와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함이 깔려있다.
작은애와 재미있게 영화를 보고 나오니 화려한 야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색찬란한 불빛이 빛나는 빌딩숲을 내려다보니 영화의 감상과 함께 뻐근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어제 나는 하루 종일 아무도 구속하지 않는 편안한 집에서 뒹굴며 책을 읽기도 하고 원두를 갈아 향기 좋은 커피를 내려 공작부인처럼 우아하게 마셨다. 오후에 아들의 문자가 왔고 시간 맞춰 나가 맛있는 저녁을 먹었고 이어 영화를 보고 나오니 화려한 야경까지 만족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보다 더 나태한 행복이 어디 있나 싶은 미안한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너무 좋다'는 말을 연발하는 나를 향해 작은애는 '엄마는 편하게 지낼 자격이 충분해요'라고 응답한다. 자격이 충분하다는 말에 감동하면서 나는 '자격'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를 추적한다.
나의 유년시절 최초의 고민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는 강박이 있었다. 나는 두 언니처럼 이쁘지도 않았고 내 밑의 남동생처럼 확실한 성 정체성도 얻지 못한 그저 그런 평범한 여자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이쁘지 않으니 안아주지 않았고 관심받지 못했다. 눈치껏 행동하지 않으면 혼나기 일쑤였고 보호받지 못했다. 그렇게 깨우친 나의 생존방법은 착한 아이로 살아야 한다는 선택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착한 것이 '나다운 것'으로 믿게 되었다. 착한 아이는 상대의 기분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눈치껏 행동하는 존재였다. 집안일을 기꺼이 하는 존재였고 그것이 나의 쓸모를 증명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애어른이 되었고 사랑받지 못한 나를 자책했다. 성장과정에서 체(體)화한 것은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그것이야 말로 내가 사랑받고 인정받고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또 애를 낳고 기르면서 나는 끊임없이 상사와 동료들과 시어머님과 남편과 심지어 아이들에게까지 '쓸모'있고 '사랑받기'위해 노력했다. 사랑을 받기 위한 노력은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나의 감각과 위치를 절대 잊지 않는 훈련이 동반된다.
내가 결혼할 당시만 해도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전업주부가 당연한 정서였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집안일의 장기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아이가 어릴 땐 남편은 아내가 전업주부라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여기지만 아이가 성장하고 남편도 나이가 들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집안일의 비싼 대가에 대해 부양에 대한 부담이 쌓일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어떡하나, 나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될 것이다.
어느 순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나의 지령은 '슈퍼우먼'으로 바뀌어 있었다. 동동걸음으로 미친년처럼 육아와 직장을 오가다 보니 내가 사라지고 있었다. 남들이 인정하는 슈퍼우먼은 있었지만 자아 없는 나만 남은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다 번아웃이 왔고 그 해 30여 년 모셨던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 내 나이 53세였다. '어느 날 갑자기'라는 말을 나는 믿는다. 정말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실타래가 한꺼번에 풀리는 날이 온다. 나는 번아웃과 시어머님의 소천을 핑계로 은퇴를 강행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쓸모 있으려 노력하지 않으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남편과 내 아이들은 편하게 지낼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나는 노력 없이도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