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기준을 설정하자
더 큰 문제는 시간을 낭비하고도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모르는 데 있습니다. 무지 덕분에 그나마 상실을 견딜 수 있나 봅니다.
- 그럼에도 인생은 흐른다 / 세네카
작렬(炸裂)하듯 폭염 공격을 퍼부었던 지난여름 내내 안팎의 더위와 씨름하느라 발길을 끊었지만 가을이 오자마자 남편과 나는 다시 뒷산을 찾고 있다.
이른 아침 숲과 함께 하는 산책은 묘한 생동감이 있다. 새벽이슬을 담고 있는 이파리 틈바구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벌레들을 발견하는 것과 오염되지 않는 선선한 공기에 올라탄 새들의 우렁찬 지저귐은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느끼게 해 준다. 숲도 질세라 숙면을 한 듯 쾌적한 선명함을 자랑한다. 나는 돋보기를 든 식물학자처럼 여름동안 변한 구석구석을 사랑스럽게 관찰하기 바쁘다. 지난봄에 꽃을 피우지 않아 걱정을 안겨준 벚꽃나무는 병마를 이겨낸 듯 기세 등등 앞을 가로막고 서있다. 고통의 시간이 그녀를 더 단단하게 만든 모양이다.
숲 속은 여름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피어있는 작은 들꽃들과 이미 늦가을로 착각한 각양각색의 이파리와 익어가는 과실과 껍질들이 하나 둘 뒤엉켜 다채롭다. 봄의 새순이 올라오던 땅에서 비와 바람으로 먼저 떨어진 나뭇잎들과 혼합되어 뒤섞이고 부식토로 변해가는 모습은 신기할 따름이다. 시간을 통과한 숲 속에서는 곤충이나 작은 생명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밑거름으로 다시 탄생하는 것이다.
나는 아등바등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현재의 삶에 감사하고 있다. 물질적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후련함이다. 이것은 부자의 기준을 낮추고 인간관계의 집착에서 벗어나자 자연스럽게 찾아온 자유다. 적당한 선에서 자기만족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고 깨닫는다.
나의 기준은 우리 부부가 은퇴직전까지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우리 명의의 집을 하나 장만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운 좋게도 우리는 계획대로 전세기간에 쫓기지 않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주거지가 확보되었고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스스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물질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자랑이 아니며 그렇다고 모든 대가를 감수하며까지 돈이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기준에 기초했다.
명절이 다가오니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통증이 되어 친정엄마가 자주 떠오른다. 엄마는 하늘나라에서만큼은 자유로우실까. 지독하게 가난하지 않았음에도 친정엄마는 삶의 가치가 오로지 돈으로 환산하며 사셨다. 가족의 일원 모두는 엄마의 기대치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 가치는 적정선이 없었기에 모두들 지쳐갔고 어느 순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친정엄마는 갑작스럽게 별세하셨고 이후 돈 때문에 형제들은 싸움이 났고 남처럼 흩어졌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싸움 중재에 대한 노력의 고단함이 힘들어 나는 포기하자 보상처럼 자유를 얻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돈에 대한 '집착과 의존'이라는 미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돈의 가치를 '많으면 좋지'로 두리뭉실 포장하며 웃어넘긴다. 하지만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등식에서 나온 답변이라면 문제가 있다. 돈이 우리의 가치와 동일시하는 순간 부자가 아니면 무가치하다는 사고방식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가난하다는 것은 가진 게 별로 없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시간을 보낸다. 친정엄마와 마지막 나눈 대화가 아직도 생각이 난다. 그날 오후 쓰러지실 것을 몰랐던 엄마는 뇌졸중인 남편을 바라보며 130살까지 살자고 농담을 하셨다. 인생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온다.
만족하는 삶은 스스로 적정선을 설정해야 가능해진다. 나는 그 증거를 산책길 숲 속 나무에서 찾으며 확인받는다. 건장하고 비바람에도 끄덕 없이 견디는 나무는 처음부터 강하지 않았다. 나무마다 다르지만 나무는 뿌리를 깊고 튼튼하게 내리는 유형기(幼形期)를 평균 5년 정도 거친 후에야 비로소 하늘을 향해 줄기를 뻗기 시작한다고 배웠다. 짧지 않은 시간 뿌리에 힘을 쏟은 덕분에 성목으로 자랄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멋지게 자존감을 잃지 않고 성장하고 살다 생명이 다하면 고사목(枯死木)이 되어 숲의 일부로 조용히 돌아간다.
우리는 현재의 보상을 선택함으로써 미래의 더 큰 행복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자유롭고 독립된 삶이란 스스로 건강을 지키는 관리능력이며 자신이 원하는 일상을 꾸준히 영위하는 데 있다. 그 수단에 돈이 따라오게끔 방향부터 설정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