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가도 원자는 남는다
가을은 참 이상한 계절이다.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 가을은 / 법정
흔들거리던 왼쪽 어금니를 기어이 발치했다. 아직은 쓸만하다고 버티는 나를 의사는 귓가에서 앵앵대는 모기를 빨리 잡아야 한다는 듯 치아 X-ray로 제압해 버렸다. 공포주입은 결정을 빠르게 추진한다. 어금니가 있던 자리에는 작은 동굴이 생겼다. 혀가 어색한지 연신 동굴을 기웃거린다.
가을의 선선한 기온이 뜨거웠던 두뇌를 식혀서일까. 산다는 것에 대한 물음을 하게 한다. 중년 이후는 계절로 치면 가을쯤 되지 않을까. 흰머리가 셀 수 없이 나오고, 입가 주름은 볼풍선을 아무리 불어도 펴지지 않는다. 임플란트를 해야 하는 치아가 한 개씩 늘어간다. 모임이나 행사일정이 잡히면 귀찮아도 염색을 하고 화장을 하지만 어느 순간 이마저도 생략하는 날이 올 거라는 것을 예상하면 조금 우울해진다.
심란한 마음으로 치과계단을 내려오는 데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친정엄마가 생각이 난다. 엄마는 이렇게 가을이 막 찾아올 즈음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내게 사랑과 원망과 슬픔을 동시에 안겨준 존재였다. 나 좀 봐달라고 졸랐지만 엄마에겐 평생 오직 아들 하나만이 당신을 구원하고 사랑할 대상이었다. 그런 신념을 알면서도 엄마가 힘들고 아프면 나를 찾는 그 순간이라도 좋아서 매달리듯 살았던 것 같다.
매번 식사가 부실하던 엄마가 갑자기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시래기 된장국이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한 솥 가득 끓여 갔었다. 맛있게 드셨고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아파트를 나왔었다. 엄마는 베란다 창가에 서서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셨다. 그것이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다. 가끔 뜬금없이 가슴이 아프고 눈자위가 뜨거워지는 것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이런 내게 언젠가 읽은 '인간은 가도 원자는 남는다'는 물리학 교양도서가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는 수십억 년 전 어느 별 안에서 만들어져서 초신성의 폭발과 함께 우주 공간에 흩어지거나 적색 거성의 표면에서 흩날려서 떠다니다가 서로 만났다. 우리는 언젠가 우주 어디선가 일어났던 초신성의 흔적이며 수많은 별들의 죽음 속에서 태어난 존재다. 우리는 언젠가 죽겠지만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는 언제까지나 남아서 지구 어느 곳인가, 혹은 우주 어느 곳인가에서 또 무엇인가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 불멸의 원자 / 이강영
대기 중의 공기입자는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그대로이기 때문에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과 같은 공기를 흡입한다는 의미다. 나는 엄마가 생각나면 눈물대신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며 하늘나라 안부를 묻는다.
느릿느릿 생각에 잠겨 걷는데 주택가 계단에 옹기종기 줄 선 화분에 물을 주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양지바른 곳에 화분들을 골고루 햇볕을 배분한 주인의 마음에 여유가 있다. 등 뒤에 살짝 보이는 늘씬한 줄기의 짙푸른 잎에 달린 진분홍 꽃이 있다. 엄마가 좋아하던 진분홍색. 나도 모르게 멈춰 사진을 찍으니 아주머니가 묻지 않은 대답을 해주신다.
"우창꽃이에요"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라며 웃으며 인사한 뒤 뒤돌아 오며 방금 찍은 사진 속 꽃에서 다시 한번 세상에 없는 친정엄마를 떠오른다. 엄마는 잘 사시다 가신 걸까. 하지만 이마저도 내가 함부로 행불행을 재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심장이 옥죄여 오며 쓰러지실 때, 그 아픈 순간에 나를 찾았을 거란 생각이 슬플 뿐이다.
누구나 태어나고 성장하고 그리고 죽는다.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영원한 미스터리다. 죽음이 슬픈 것은 영원한 불통의 관계 전환 때문이지만 나는 알 수 없는 세계의 궁금증보다 확실한 현재 살아남아 있다는 자각에 집중하려 한다.
중요한 것은 길고 짧은 삶의 허무가 아니라 그 세월 속에 담긴 가치 있는 삶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삶은 죽음을 기억하며 살면 가능해진다. 살아있는 모든 관계에 집중하면 모두가 소중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