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리면 참지 말고 자야지
어리고 젊었을 때는 어려운 줄 모르고 막 대했던 잠이 이제는 상전이 됐음을. 마음도 힘든데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치기로 불면까지 상대해야 하는 밤엔 어쩔 수 없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미칠 것 같은 괴로움의 발진을 그냥 생으로 견딜 수밖에.
'아무튼 시리즈' 중 정희재 작가의 '잠' 이야기를 읽었다. 10만 독자층이 있는 이 분의 베스트셀러 책을 죄송하지만 아직 읽지 않았다. 하지만 독서순서에 대한 강박이 없는 나는 이 책으로도 충분히 삶을 대하는 그녀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활자로 세상밖에 나온 책들은 언제든 인연처럼 만날 수 있다.
처음엔 '잠'이라는 소재로 한 권의 책이 탄생할 수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잠에 대해 진심인 저자의 글들을 읽어가며 '잠 덕후'를 인정하고야 말았다.
저자는 대학시절엔 생활관(기숙사)에서 잠을 하도 오래 자서 신생아실이라는 별명까지 얻었고(참고로 신생아는 16시간 이상을 잔다), 30분만 자자고 졸음에 굴복하던 날, 친구의 전화로 깨서 보니 24시간을 꼬박 자고 일어났다고 한다. 아니 어떻게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꼬박 24시간을 잘 수가 있지?
'잠'에 대한 고찰을 엮은 그녀의 의도에 의심을 거두라는 듯 고백한 그녀의 잠 덕후의 운명사를 읽다 보니, 제일 먼저 들었던 감정은 참 살기 어려웠겠구나 싶은 마음이었다. 우리나라 정서상 한창 공부하고 일할 나이에 잠에 취해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뭔가를 열망하고, 실망감을 이겨내며 산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걸 인지했더라면 아무 때나 쏟아지던 잠에 조금은 더 너그러웠을까. 자신을 긍정하고, 스스로 애씀을 알아주고, 셀프 격려할 수 있는 청춘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걸 자기 합리화와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무엇이든 '운명'으로 받아들이면 또 다른 길이 보이게 마련이다. 그녀는 잠의 무대라도 인터내셔널 하게 넓혀보자는 결심에 직장을 정리하고, 인도여행을 떠나고 티베트 산간마을에 있는 스님을 만나기로 결심한다. 자신만의 잠의 진실을 찾아 수면 역사를 시작한다.
너무 웃겨서 혼자 키득대던 대목이 있다. 그녀가 티베트 데라둔(Dehradun) 슬리핑 라마를 만난 이야기다. 자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수행자에 혹한 것은 잠 덕후로써 당연한 호기심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잠 수행법에 대한 그동안의 의문과 질문을 잊고 일상적인 문답만 오가다 되돌아왔다고 한다. 수행법은 듣지 못했지만 확실하게 눈으로 확인한 것은 매끄럽고 윤이 났던 피부였다는 것. 잘 자야 피부가 좋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글이었다. 당연한 의학상식을 그 멀고 험한 여정을 견디며 확인했다. 다들 알겠지만 잠을 잘 자면 혈관이 이완되어 혈류가 잘 돌고 질 좋은 수면은 심장과 혈관의 노화를 늦추기 때문에 피부상태가 좋을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하나의 퍼즐처럼 짜인 스토리 안에서 운명처럼 자신이 걸어왔다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다. 나이 들면 운명론자가 된다는 말은 패턴과도 같은 습관의 수레바퀴 안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닐까. 저자는 잠 수행으로 티베트 스승을 만난 20년 후 '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관심과 집중이 쌓이며 오롯한 자신만의 길을 하나씩 놓아가고 있다.
젊어서 나는 일과 가정이라는 완벽한 양립을 위해 잠이라는 시간을 양보하며 살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좋았던 것은 바닥에 머리를 닿기만 해도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정신을 잃고 잠들었다는 점이다. 당시 나의 소원은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잠만 잤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이제는 언제든 잘 수 있는 여유가 생겼는데도 새벽에 깬 이후 다시 잠 못 드는 날들이 늘어간다. 깊은 잠 어느 고요한 바다에서 잔잔한 여행을 하고 있는 남편의 숨소리가 부럽게 들린다. 통잠이 어려워진 나이가 된 것이다.
부족한 수면의 질은 여러 결핍으로 주눅 들었던 과거의 실수들을 하나로 뭉쳐 잡념을 만들고야 만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찾아오는 잡념들의 상처는 잠이 부족한 뇌의 오작동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면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수면의 중요성은 의학적 검증으로도 충분히 강조되고 있다. 깨어있는 동안에 우리의 뇌는 계속 손상되고, 잠을 자는 동안에 치유되고 고쳐진다고 한다. 양질의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못하면 건강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 책에서도 잠깐 언급이 되지만 잠 안 자고 버티어 기네스북에 오른 학생의 사례는 무시무시하다. 그는 264시간(11일)을 자지 않았는데, 잠을 안 잔 3일째 되는 날에는 거리의 입간판을 행인으로 착각했다. 6일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잊어버리는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렸다.
뇌과학 교양도서를 읽다 보면 '수면'에 대해 상당히 중요하게 언급한다. 수면이 부족하면 뇌뿐만 아니라 면역체계가 무너져 암에 걸릴 위험이 2배로 증가한다. 알츠하이머 발병에 결정적 요소이며 우울증이나 불안, 심장마비등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해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잠 덕후'인 저자는 꿀잠을 자기 위해서라면 '장비 발'도 강행하라 강조한다. 귀한 어둠을 보존하기 위한 것들이다. 암막, 안대, 바디 필로우와 수면 베개, 이불 등 각자의 기호에 따라 필요한 것을 구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규칙적인 취침시간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약간 서늘하게 잘 수 있도록 샤워 후 곧바로 침대 위로 올라간다. 긴 호흡을 들이쉬고 내 쉬다 보면 이완되는 느낌을 받는데 수면에 많은 도움이 된다.
잠을 함부로 여기고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 잠은 통제가 안되고 저축도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