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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이 바꿔야 한다



미 국회의사당 앞길, 우리나라 광화문 광장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길 모두 좌우대칭의 모습이다. 권력을 나타내는 공간이 좌우 비대칭인 경우는 없다. 왜 권력의 공간은 모두 좌우대칭일까?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규칙을 찾는데,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하나가 시각적 좌우대칭이다. 어느 공간이 하나의 규칙을 보일 때 그 공간은 하나로 인식된다. 모든 사람이 같은 군복을 입고 있을 때 하나의 군대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좌우 대칭의 공간은 하나의 규칙하에 놓인 하나의 큰 공간이 되는 것이다.





주말이면 광화문 광장에 집회와 시위로 사람들이 모인다.  그곳이 단지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편해서일까.  물론 그런 이유도 없지 않지만, 건축물을 인문학적으로 풀어 해석해 주는 윤현준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시각적으로 좌우대칭인 공간이 바로 권력의 중심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요한 축의 선상에 위치한 공간을 점유한다는 것은 권력의 장악을 나타낸다.


건축의 역사를 살펴봐도 왕들은 시선집중을 위해 평면을 좌우대칭으로 만들고 중심축을 잡아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어 위엄을 시각적으로 세웠다.  


건축물과 도시 형성에 대한 해석과 그의 방식은 꽤 흥미롭고 지적향유를 느끼게 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흔히 건축물을 '물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유기체'라고 생각한다. 건축물은 도시설계자에 의도대로 만들어지지만 자연발생적인 방식에 의해 진화되기 때문에 유기체라는 해석이다. 그것은 저자가 도시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는 시각에서 시작하는데 그런 의미로 책을 읽다 보면 어렵사리 그의 생각이 수긍이 된다.


이 책은 건축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는데, 어떤 공간에서 지내는 것이 사람에게 정서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도움이 되는가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 책의 첫 테마에서 다루는 학생들이 12년을 머무는 학교건물에 대한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이다.  아이들이 창의성이 부족한 것은 무엇보다 양계장 같은 시설을 갖춘 학교건물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2미터도 안 되는 천장높이와 교도소 같은 감시체제 안에서 창의성은커녕 전체주의적 사고를 주입시키게 안성맞춤이란 것이다. 선정한 제목도 '양계장에서는 독수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아찔한 내용이 가득했다.  


저자가 야심 차게 신도시 학교설계를 맡아 창의성 있는 학교를 설계하려 했지만 결국 바뀌지 않는 교육시설감독감의 사고에 진저리를 친 내용을 읽을 땐 너무나도 화가 났다.  건축물 분야에서 가장 전문가인 그에게 창의성을 발휘할 학교는 어떤 모습일까.


학교 건물을 저 층화 되고 분절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사람 몸의 50배 정도 크기의 주택 같은 교사가 여러 채 있고 그 앞에 다양한 모양의 마당이 있는 공간에서 커야 한다.



현재 한국의 건물들은 권력과 힘의 양상을 보이는 건물들이 대다수다.  그동안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어디 편하게 갈 곳 없는 도시라는 느낌만 드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중심도 없고 경계도 모호한 건축물은 흥미롭지 못하다.  갈수록 커져만 가는 대형 아파트와 대형 쇼핑몰, 그리고 원활한 차량운행을 위한 넓은 도로로 인하여 사람들은 모두 차 안에서 지하에서 건물 안으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도로가 넓어지고 자가용이 많아지면서 사적인 공간은 넓어졌지만 정작 공적인 정주 가능 공간은 줄어든 것이다.  도로에 사람들이 붐비면 자연 상권이 살아나고 활력이 넘칠 것이다.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지하로, 대형쇼핑몰로 사라져 버렸다.  


필자가 주장하는 법칙 중에 '3차선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이 법칙은 차도가 3차선 이하인 경우에는 보행자의 흐름이 이어지지만 4차선보다 넓으면 단절된다는 것이다.  좋은 예가 홍대 앞이다.  홍대 정문 앞의 길은 3차선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캠퍼스에서 홍대 앞 블록으로 넘어간다.  홍대 앞 상권의 길들을 조사해 보면 삼거리포차 앞의 길만 4차선이고 나머지는 다 3차선 이하다.



저자는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말했던 지하철과 공원을 잇는 도시계획을 소망했다.  보행자와 블록의 소통을 강조하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충분히 설계와 실천가능한 내용이라 오히려 놀라웠던 것 같다.  주변의 공간을 읽을 줄 아는 그에게 변하지 않는 답답한 거리와 건축물들은 써먹지 못하고 녹스는 폐기물로 보이는 갈증이지 않았을까.  


뉴욕 맨해튼 경우 10킬로미터 내에 10개의 공원이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 말은 뉴욕시민들은 7분만 걸으면 어느 공원이든 걸어간다는 뜻이다.  비싼 뉴욕에서 좁은 방에 살지만 공적인 정주 가능공간인 공원이 여러 개 있으니 뉴욕시민들은 활기찬 것이다.  우리나라 서울은 15 킬러미터 내에 9개 공원밖에 없다고 한다.  연속성이 떨어진 단절된 도시에 사는 것이다.  그래도 그저 푸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학자답게 서울시의 도시계획을 꿈꾸는 저자가 좋았다.  


1.5킬로미터 간격으로 '공원-지하철역-공원-지하철역-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면 서울시는 연속적으로 걷고 싶은 거리로 연결된, 소통이 활발한 도시가 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차선폭을 좁히고 선형 공원을 만드는 것도 유효하다.



저자는 런던 구도심에 있는 성바울 성당과 데이트 모던 미술관을 연결하는 보행자 다리 건설을 예시하면서 강북의 서울숲과 강남의 로데오 거리를 연결하는 보행자 전용다리를 상상했다.  나도 그의 상상을 따라갔다.  


결론적으로 재미있는 책이었다.  건축물을 통해서 표현되는 권력과 힘의 대비도 재미있었고 현대인들이 대형건물들로 인해 위축되는 외로움을 찾아낸 관찰력도 예리했다. 그것은 건축학자로서 풍요로워진 시선이 있기에 가능한 것 같았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내 삶이 즐겁고 행복한 이유는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어디서 살 것인가 / 유현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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