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이 가득히 쌓인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논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에 눈과 관련된 것은 특별히 없다. 그 시절 겨울에도 눈이야 왔겠지만 방학마다 할머니댁으로 보내졌던 나는 낯선 곳에서 눈이 와도 외출하지 않고 지냈나 보다. 기억이란 '눈 내리는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을 누구와 어떻게 보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성인이 되고 남편과 연애를 하던 시절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즈음이어서 송내역 앞에 로데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CNA팬시점에는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데코용품과 카드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남편이 부모님과 식사를 하자고 제안해서 고깃집에서 외식을 하고 다 같이 노래방에 갔다. 아빠는 당신의 십팔번 전영록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를 신나게 불렀고 남편은 그의 십팔번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불렀다. 엄마랑 나랑 동생도 차례대로 한 곡씩 뽑아냈다. 노래방이 끝난 후, 술이 센 우리 아빠와 대작을 하느라 취해버린 남편이 옷을 사주겠다고 해서 24시간 운영하는 송내역 앞 쇼핑몰 '씨마'에 갔다. 그때는 인터넷쇼핑이 대중화되기 전이어서 동대문 시장과 쇼핑몰이 도매상을 상대로 밤샘영업을 했다. 소매도 판매했기에 가끔 동대문까지 가서 밤샘쇼핑을 하고 새벽 첫 전철로 집에 돌아오곤 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쇼핑을 사랑하는 나는 예쁜 옷까지 선물 받아서 좋은 기억으로 남은 눈 내리는 날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동네 아이들과 눈싸움하고 꽁꽁 얼은 손으로 눈놀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도 놀기에 성이 안 찬 아이들을 데리고 키즈카페까지 다녀와야 했다. 나처럼 눈에 대한 기억이 없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지난주에 첫눈이 왔다. 이제는 나이가 들었는지 눈이 오면 아름답다는 감상보다 일 나갈 때 운전걱정이 앞선다. 물론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는 오십이 된 내 눈에도 예쁘다. 그러나 아이들을 키우려 애쓰는 나의 책임감이 먼저 앞서는 것이다. 마냥 감상만 할 수 없는 마음이 아쉽지마는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나의 책임감 또한 소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