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로 빠르게, 많이 그리고 끝까지 먹는다. ‘푸드파이터’ 까지는 아니더라도 '푸. 파'의 세계에 손가락 정도는 살짝 담글 순 있다. 내가 이렇게 대식가가 된 것은 우리 집 남자들의 영향이 크다. 일단 남자 치고도 유난히 많이 먹는 남동생이 2명이나 있어서 빨리 먹지 않으면 내 몫을 쟁취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우리 삼남매의 한 달 식비에 몇백만 원을 쓸 정도로 말 그대로 음식을 퍼다 날라주셨지만 성장기였던 우리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심지어 ‘자식들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라는 말을 한 사람은 진정한 배고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일 거라는 아빠(aka.김사장)는 음식에서 만큼은 도통 우리에게 양보가 없었다. 때문에 오죽하면 나는 초등학생 때 소풍 가기 전 날에는 다음날 싸갈 도시락 위에 크게 '상했음'이라고 적어놓는 잔꾀를 부리기도 했다. 물론 정글 같은 우리 집에서는 누군가 그 도시락마저 먹어치워 버리곤 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랐으니 난 밥을 빠르게 많이도 먹게 되었고 이 식습관을 내 몫의 급식을 받아먹는 청소년기에 고쳤다. 하지만 아직도 동생들과 밥을 먹을 때면 나뿐만이 아니라 동생들도 본인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음식을 '흡입'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을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그만큼 난 가리는 음식이 있는 것은 사치인 전투적인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귀뚜라미도 튀기면 먹는 내가 유일하게 못 먹는 음식이 있다. 바로 ‘팥’이다. 다른 건 다 먹어도 팥만 못 먹는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의아해하면서 십중팔구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너 혹시 귀신이야?”
나도 왜 하필 ‘팥’을 못 먹는지 모르겠다. 팥 관련 업무 종사자분이 이 글을 보면 가슴이 무척 아프시겠지만 팥은 죽으로 만들어도, 삶아도, 설탕에 졸여도, 떡 사이에 숨겨도, 말 안 하면 팥인지 모를 정도로 으깨 놔도 싫다. 어떻게 숨겨놔도 팥 한정 발작 버튼인 내 혀는 팥이 들어간 무언가를 먹는 순간, 기가 막히게 팥만 골라내어 뱉어낸다.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극복하고 싶은데 팥을 입에 넣은 뒤 어떻게 씹어야 하는지, 또 팥에서 어떤 맛을 느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에게 못 먹는 음식이 있다는 건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거기다 내 영원한 라이벌인 남동생들(준희&재희)이 팥죽을 먹는 것을 보기만 해야 하는 기분이란. 어쨌든 이 정도로 팥을 싫어하는 내가 중국에서 팥에게 무차별 공격을 받은 날이 있었다. 그날의 난 내가 무척 좋아하는 꿔바로우를 먹고 나서 한껏 기분이 들떠있었다. 이런 날에 밀크티가 빠질 수 없지! 내 최애 밀크티 집인 1 학식당 카페 코너에 갔었다. 그날은 말차가 들어간 밀크티(抹茶奶茶)가 먹고 싶어서 대충 抹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음료를 손으로 가리키고 돈을 딱 맞춰 냈다. 그러자 돌아오는 건 카페 아주머니의 의아한 목소리.
“너 정말 이거 시킨 거 맞아?”
‘맨날 시키는 건데 왜 또 물어보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흥이 과하게 나면 일을 그르치곤 하는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계산을 했다. 곧이어 음료를 받고서 버블과 밀크티가 잘 섞이게 위아래로 신나게 흔들고 빨대에 입을 댄 뒤 힘껏 빨아들였는데 입안에 가득 찬 건 그토록 기대한 타피오카 펄(버블)이 아니라 팥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팥을 한 번에 입안에 넣어본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입 안에 버블을 한 번에 왕창 담을 생각으로 미련하게도 참 많이도 빨아들였던 나는 가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팥 감별 기계인 내 목구멍은 기가 막히게 밀크티만 삼켜버리고 팥은 뜰채처럼 걸러버렸다. 무방비로 당한 팥 수류탄 공격은 내 사고를 정지시킬 뿐만 아니라 날 길 한가운데서 삐걱대며 굳어버리게 만들었다. 입안의 팥과 서로 어색해하고 있다가 몇 분 뒤(체감상 몇 시간) 약간의 의식이 돌아온 나는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가 팥을 말 그대로 우와악 하고 다 뱉어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 일의 원흉인 밀크티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밀크티가 무슨 죄가 있을까? 밀크티라도 살려야 한다. 컵에 꽂힌 빨대의 끝을 이로 씹어서 철저하게 팥이 딸려 나오지 못하게 한 뒤 밀크티만 쫌쫌따리 빨아 마셨다. 알고 보니 내가 시킨 음료는 말차 맛 밀크티에 팥이 토핑으로 들어간 음료였다. 내가 시킨 거라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카페 사장님은 친절하게도 내게 되물어봐 주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이런 메뉴를 만든 이유가 대체 뭐람?
참 어렵게도 밀크티를 마신 뒤 마음을 추스르면서 나는 이런 생각까지 했었다. 만약에 내 인생을 걸만큼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생겼는데 그 남자가 팥죽집을 한다면? 그래서 자기가 정성 들여서 쑨 팥죽을 제발 먹어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미안하지만 절대 못 먹을 거 같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지창욱 오빠가 부탁해도 나는 정말 못 먹을 거야. 셔누가 부탁해도... 로운이 부탁해도... 절대! 네버!
김도희
Ps. 심지어 자꾸 팥 팥 거리니까 팥 이름이 팥인 것도 이상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