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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by 얄미운 하마

눈물이 났다. 오디오북으로 키다리 아저씨를 마침 다 읽은 참이었다. 어릴 적 생각도 나고, 오디오 북 목차에 있어서 잠도 잘 겸 틀어 놓았는데 끝까지 다 듣게 되었다. 들었다고 해야 하나 읽었다고 해야 하나. 마지막 장면을 다 듣고는 울컥해서 한참을 울었다.


쥬디가 뉴욕으로 달려가 키다리 아저씨를 만나고 돌아와 저비스 펜들턴, 그러니까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를 알게 된 후 흥분해서 쓴 편지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내레이터가 잔잔한 목소리로 읽어 주는 가운데 쥬디가 머무르고 있는 록 윌로우라는 마을의 전원 풍경이 상상이 되면서 뭔가 나의 저 깊은 무의식의 세계 속에 들어가 있던 기억의 한 페이지가 열린 느낌이었다.




중학교 때였나, 고등학교 때였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키다리 아저씨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그 시절이 생각이 나서일까. 눈물이 난 이유를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때, 이 책을 읽었던 때, 유난히 상상이 많았던 여자 아이, 현실은 참 우울했는데, 책 속에서 영화 속에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던, 아니 잊고 싶었던 나였던 것 같다.


키다리 아저씨를 읽었을 때는 나에게도 누군가 숨어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싶었다. 사랑의 가족을 읽을 때는 많은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들 속에서 7남매였던 우리 집이 겹쳤다. 다른 점이라면 그 책 속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참 따뜻하게 가정을 지켰다는 것일 게다. 작은 아씨들을 읽을 때는 톰보이 같았던 둘째 딸 죠를 닮고 싶었고, 빨간 머리 앤, 부활, 죄와 벌, 펄벅의 대지도 재미있게 읽었다.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가슴 아픈 사랑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었다.


당시에는 세계 명작이라는 타이틀로 어린아이들에게 맞추어 출판이 된 문고판이 많았다. 사십이 다 되어 직장 생활을 시작하신 친정아버지께서 주말이면 광주에서 시골집으로 내려오셨다. 대문으로 들어서시던 아버지의 손에는 어김없이 열 권씩 노끈으로 된 책묶음이 들려 있었다. 책을 너무나 좋아했던 어린 나는 밤이 늦도록 자지 않고 읽었었다.


시골 국민학교 교실 뒤편에 놓여 있던 책들 또한 다 읽어치웠다. 가난한 시골 마을에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이나 책방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어디서든 책을 발견하면 닥치는 대로 읽곤 했다. 주로 세계명작이다 보니 세계 곳곳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자연스레 다른 나라들을 동경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그 마음이 씨앗이 되어 지금 이렇게 미국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갱년기 탓으로 돌려야 하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기분이 나쁜 것은 또 아니다. 생생하게 소환되는 어릴 적 기억들, 책을 읽고 있던 내 모습과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마치 추억으로 가는 마차라도 탄 듯, 영화처럼 다시 떠오른다. 동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다시 느끼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키다리 아저씨를 오디오북으로 듣다가 생각이 여기까지 흘러왔다. 라이프 스토리를 쓰면서도, 오디오북을 듣다가도 나도 모르게 어릴 적 어딘가로 자꾸 거슬러 올라가 울컥울컥 한다. 글을 쓰면서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일까 싶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책이 좋아 닥치는 대로 읽던 소녀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이제 힌머리가 성성한 나이가 되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쓰다 보니 자꾸만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추억 속으로 들어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살아가고 있던 어린 나를 만난다. 그리워서, 안쓰러워서 눈물이 나기도 한다.


오늘 따라 키다리 아저씨가 내게도 찾아와 주길 바랐던 어린 소녀가 사무치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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