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어제 일을 마칠 때쯤 피곤이 몰려와 쉬어야겠다 싶어 sick call을 날렸다. 미국에서 일을 하는 것의 좋은 점 중 하나가 이것이다. 꼭 아프진 않더라도 많이 피곤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으면 sick day를 쓸 수 있다. 못 나온다고 전화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물론 너무 많이 쓰면 매니저로부터의 면담요청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냥 오케이다.
"Okay, feel better." 끝.
새로 온 테크니션, Ishmael이 아직 오리엔테이션 중이라 투석기계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더니 저녁때쯤 되었을 때 어깨부터 등 쪽으로 찌릿찌릿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눈도 좀 침침해지고 몸이 좋질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매니저한테 다음 날 못 나온다고 미리 문자를 넣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전화하자니 또 피곤해질 것 같아서였다. 출근 두 시간 전까지는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얻은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잠을 충분히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쳐졌던 몸이 살아났다. 오늘따라 봄햇볕이 유난히 좋다. 뒤뜰에 나와 앉아 따스한 햇살에 몸을 맡기고 한참 시간을 보냈다. 잠깐 동안 가진 이 여유로 그동안의 수고가 보상이 받는 것 같았다. 색연필과 노트를 가지고 나와 뜰 구석에 있는 찔레나무를 그려 보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 하얗게 꽃이 피면 너무나 예쁘다. 파릇파릇 싹이 돋아 연두색이 싱그럽다. 보들보들 새싹을 만져보며 봄의 생기를 느껴보았다.
나이가 들었을까. 쉬는 날이면 누굴 만날까 전화를 돌려보던 내가 이제는 누가 만나자 할까 봐 걱정이다. 온전히 홀로 있을 시간이 많이 없어 이렇게 혼자의 시간이 주어지면 하루가 가는 것이 아깝다. 남편과 딸들이 모두 일하러, 공부하러 가고 나면 하루의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찬양연습도 하고, 글쓰기도 조금 하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 노래도 유튜브로 들어보고, 밀린 과제도 하고, 한 두 가지 저녁 반찬도 만들어 놓는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거나 그도 야의치 않으면 뒤뜰을 한참 걸어 다녀 본다.
전에는 혼자 있는 것이 싫어 늘 약속을 만들었다. 집에 혼자 있다 보면 세상에서 따돌림당한 것처럼 외로웠었다. 누굴 만나고 온다 한들 나의 허기가 채워지는 건 또 아니다. 정서적인 허기였을 것이다.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 웬만해선 채워지지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이 서운해하는데도 자꾸 바깥으로 나갔다. 누군가를 만나 잠깐 허기를 채우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집에 혼자 있어도, 밖에서 누구랑 같이 있어도 늘 배가 고팠다.
나이만은 아닐 것이다. 상담을 공부하면서 나에 대한 마음이 달라졌다. 온 인생을 따라다니던 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떠나가면서 한 인간에 대한 존경심마저 올라왔다. 살아간다는 거, 살아낸다는 것은 존엄한 일이구나를 깨달았다. 동시에 나의 시간들이 소중해졌다. 그래서 하루를 온전히 누리려고 한다. 그러고 나면 나의 내면이 가득 채워지고 배가 부르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진다. 어디에 있어도 뭔가 충만하다.
둘째 딸이 선물해 준 노트에 짧은 메모들을 남기기 시작했다. 미숙한 그림도 조금씩 넣어본다. 알록달록한 색연필로 선을 긋고 동그라미, 세모를 그려 넣다 보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진다. 읽고 싶은 책 목록을 작성해 본다. 아직 사지는 않지만 장바구니에 가득 담아놓는다. 마치 창고에 보물이 가득 있는 것처럼 든든하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이 나오면 필사도 해본다. 반복해서 읽어보기도 한다.
이제 나는 홀로 있음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러다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살까 봐 걱정이 될 정도이다. 그 정도로 혼자의 시간이 좋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다. 아마도 나는 지금 나를 만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그럼 혼자가 아닌 거네. 가장 가까운 나라는 친구랑 만나서 노는 중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