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앞뜰과 뒤뜰의 풍경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앞마당에 낮게 서 있는 단풍나무부터 장미, 민트, 작약 등이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있다. 작년에 남편과 딸이 사다 심은 포도나무가 어느새 자라 우리 집 창문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손톱만 한 애기 포도송이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맺혔다. 올해는 포도를 좀 따먹을 수 있으려나 하며 보고 또 보곤 한다. 뒤뜰 구석에 있는 찔레나무가 하얀색 예쁜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날씨가 풀리기가 무섭게 거름을 주고 땅을 고르고 정성을 쏟더니 이렇게 예쁜 정원이 되었다. 날마다 탄성을 지른다. 연두색이었던 이파리들이 어느새 진한 녹색으로 변해가며 초록 세상을 만드니 볼 때마다 경이롭다. 남편의 수고와 땀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며칠 전에는 결혼한 큰 딸이 놀러 와서 뒤뜰에 심어 먹을만하게 자란 미나리를 한 봉지 따 주었다. 집에 돌아가서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무쳐놓은 미나리나물사진을 보내왔다.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이 집에 이사 온 지가 사 년이 넘어간다. 처음엔 잘 몰라서 시행착오도 많았다. 90대였던 전 주인 부부가 한동안 정원을 돌보지 않았는지 아무리 거름을 주어도 땅이 메말랐다. 식물들이 잘 자라지 않았다. 한 여름 뙤약볕 아래서 땅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고 하며 사 년이 지나갔다. 올해 처음으로 집에 대한 마음이 다르게 다가왔다. 정이 든 걸까. 암튼 집에 돌아올 때 뭔가 행복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사 년 만에 처음 드는 마음이다. 그래서인지 봄이 되자 모든 것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마당에 심은 나무들이 사랑스럽고 올라오는 꽃망울이 신기하다.
"여보, 이리 와 봐, 여기 참나물이랑 미나리 많아, 나중에 따 먹을 수 있어, 여기 봐, 작년에 교회에서 가져온 장미나무가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어."
남편은 틈만 나면 나를 불러서 자신의 작품을 자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감탄하는 일이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남편이 결혼 생활 내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깐 쉬었다 하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나 보라고 일부러 시위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 집을 사고 처음 2년간은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늘 다툼이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최고조에 달한 것이다. 이러다 헤어지겠구나 싶었다. 크고 작은 결정들을 할 때마다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한 번은 둘째 딸에게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아빠랑 계속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아."
둘째 딸이 눈물을 보이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났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전쟁으로 언제 어느 때 폭격이 시작될지 모르는 긴장이 집안에 가득했다. 그 긴장 속에서 딸들이 숨죽이고 살고 있다는 걸 몰랐다. 보다 못한 딸들의 조심스러운 제안으로 부부상담을 시작했다.
지루한 상담과 거듭되는 시행착오와 실망이 계속되었다. 일 년쯤 지나면서 35 년 만에 서로를 새삼스럽게 알아갔다. 그리 오래 살았는데 이렇게 서로 모를 수가 있나. 오래 같이 살았다고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에 대한 격했던 감정들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안쓰럽기도 했다. 아무리 싸워도 남편은 집안일을 쉬지 않았다.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 분을 삭이는 나와는 달랐다. 여전히 잔디를 깎고 물을 주고 집안을 청소했다. 화장실이 고장 나면 뚫어주었고 화장실 싱크대가 막히면 지저분한 머리카락 덩어리를 꺼내 주었다. 물 때문에 피부가 상한 것 같다고, 머릿결이 안 좋다고 딸들이 불평을 하면 지하에 내려가 무거운 필터를 혼자서 갈아 주었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늘 하던 일이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쇠처럼 지저분한 일을 다해 주고, 무거운 짐은 당연하게 들어준 남편 덕분에 내가 공주처럼 살았구나. 바퀴 벌레가 나오면 딸들은 소리를 질렀다. 아빠를 부르는 것이다. 남편은 망설임이 없다. 화장실이 막히면 아빠를 부른다. 다 할 수 있는 일인데 습관처럼 부른다. 남편은 터미네이터처럼 뚝딱 해치운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는 무정한 아내와 딸들을 위해 마징가 제트처럼 등장하는 것이다.
언젠가 아는 지인분이 남편에 대한 끝없는 불평을 쏟아 내는 내게 말했다.
"당신 남편은 말로 하는 사람이 아니야. 모르겠으면 그 사람 행동을 봐봐. 온통 가족밖에 없어. 얄미울 정도로 가족밖에 몰라. 그게 안 보여?"
큰 딸도 같은 말을 했다.
"엄마, 아빠는 말로 표현이 잘 안 되는 사람이야. 그냥 아빠의 행동을 봐. 그러면 알 수 있어. 오직 가족들밖에 모른다는 것을."
그래도 한동안 잘 몰랐다. 오십이 넘어도 이리 철이 없다. 이제야 남편의 수고와 땀이 보인다. 부끄럽지만 이제야 감사하다.
나는 여전히 늦잠을 잔다. 일한다는 핑계로 피곤하다고 뒹굴뒹굴 침대 속에서 한참 놀다가 일어난다. 남편은 새벽에 일어나서 한바탕 앞 뒤뜰을 돌아보고 물을 주고 온 참이다. 생색도 내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라고 늘 말한다. 땀 흘린 남편의 등을 다독인다.
남편이 쓸고 닦고 다듬어 놓은 깨끗한 집에서 게으른 공주로 살고 있다. 창가에 앉아 초록으로 물든 앞뜰을 바라보며 글을 쓴다. 세상의 어느 대궐이 이리 좋을까. 지난주에 통화하면서 친정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박서방 같은 사람 없다. 진국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