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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미운 하마

얄미운 하마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

by 얄미운 하마

“선생님도 다리 아프시죠? 선생님도 소아마비예요?”

막 출근해서 처치실에서 그날 할 일들을 준비하고 있는데 영순이가 지나가다가 출근한 나를 보고 말을 건넸다. 나는 딱히 대꾸할 말도 없고 해서 그냥 웃었다. 사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았던 나는 왼쪽 다리를 살짝 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경미했지만 재활원 아이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재활 병원은 대부분 소아마비나 놔성마비를 가진 아이들이 수술을 받고 짧게는 몇 달, 길게는 1-2년까지 머무는 곳이었다. 이십 대 초반 간호전문대학을 막 졸업한 내가 처음 일을 하게 된 곳이 재활병원이었다. 환자들 대부분이 나랑 나이 차이가 별로 없어서 아이들은 나를 편하게 대했다. 졸업 후 첫 직장이라 어리바리한 내 모습이 더 친근 했는지도 모른다. 암튼 내가 나이트 근무를 할 때면 여러 명의 아이들이 아예 간호사실 주변에 모여 밤을 세울 준비를 했다. 나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같이 이 얘기 저 얘기하며 밤을 지새웠다.


나이트 근무가 끝나면 퇴근을 하지 않고 농구장으로 탁구장으로 떼를 지어 돌아다녔다. 제주도에 한번 같이 놀러 가자고도 했던 기억이 난다. 실천에 옮기진 못했지만.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아이들이라 입원실 안에서 로맨스도 피어났다. 실연이라도 할라치면 온 병동이 우울에 빠진다. 울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때로는 위로하고, 그렇게 재활병원에서의 시간이 지나갔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 아이들이 입사 환영 파티를 열어주었다. 큼직한 방에 모두 모여 나를 가운데 두고 삥 둘러앉았다. 케이크도 있었다. 게임도 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암튼 그때 나에게 붙여진 별명이 얄미운 하마이다. 하마면 하마지 얄미운 건 뭘까? 얄밉다면 얄미운 거지 하마는 또 뭐지? 하마와 얄밉다는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인데. 삼십 년이 넘은 지금도 그 별명을 잊지 않은 걸 보면 그때가 참 좋았던 모양이다.


그곳에서 일 년 남짓 간호사로 근무하고 사표를 던졌다. 나이트 근무가 많은 것이 이유였다. 다들 출근하는 아침에 잠을 못 잔 초췌한 몰골로 버스를 타고 갈 때의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별로다. 한 번은 옆자리에 앉은 낯선 이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 다시는 병원에서 일 안 한다는 굳은 결심과 함께. 현실감이 많이 떨어졌던 나는 금방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 후 몇 번 작은 병원들을 기웃거리다가 결혼을 하면서 간호사로서의 삶은 일단락된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미국의 병원에서 투석실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십오 년 미국 생활 중 십 사 년은 쉬지 않고 일했다. 좋든 싫든 살아야 해서 일을 했다. 미국에서의 첫 직장은 nightmare로 기억한다. 말도 서툴고 문화도 잘 모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간호사로 일을 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보람도 있다. 내 나라에서는 그토록 싫었던 간호사라는 직업이 낯선 미국땅에서 일하는 재미를 주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지금도 가끔 재활병원에서의 날들이 생각난다.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했던 시절, 마냥 즐거워서 환자 아이들과 돌아다녔던 때, 얄미운 하마였던 시간들, 나는 그때가 사무치게 그립다. 젊었던 그리고 해맑았던 나, 지금은 딸들이 얄미운 하마라고 부르며 놀린다.


“엄마, 얄미운 하마였다며?”

지금도 궁금하다. 왜 하필 얄미운 하마였을까? 그때 그 아이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밤마다 '학습시간'을 외치며 간호사라기보다는 사감선생님 같았던 시절, 서툴고 서툴었던 사회초년생, 안경 너머로 눈을 부릅뜨고 나를 부르던 무서웠던 수간호사 선생님, 재활원 언덕으로 출근할 때면 발걸음이 참 무거웠었는데.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속삭여주고 싶다. 잠깐이었지만 행복했었다고, 얄미운 하마라고 별명을 붙여 준 아이들과 참 재미있었다고, 지금은 딸들에게 얄미운 하마라고 불리고 있다고.


그리고 브런치에서 나의 필명은 얄미운 하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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