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부대끼는 날엔 유난히 풀, 꽃, 나무가 그립다.
남편이 교회 뜰에 있던 여섯 그루의 장미 나무를 집으로 가져다 뒤뜰에 심었다. 교회 담을 따라 기다랗게 꽃밭이 있는데 그곳에 있던 장미나무가 지저분하다는 의견이 있어 뽑기로 한 것이다. 남편은 멀쩡한 나무가 버려지는 것이 아까워 가져와 우리 집에 심었다. 처음 심을 땐 과연 살 수 있을까 했는데 1-2주가 지나는 사이에 싱싱하게 뿌리를 내렸다. 여섯 그루 다 살아 내년 봄을 기대하게 했다. 남편은 날마다 물을 주고 흙을 다듬고 정성껏 가꾸었다.
"식물 가꾸는 것처럼 당신 부인하고 딸들을 좀 챙겨 줘 “
농담 삼아 건네는 말이지만 사실은 진심이다. 남편은 집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뜰에서 보낸다.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고 틈틈이 꽃나무를 사다가 심었다. 3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정원을 가꾸어야 하나 막막했았다. 나는 사실 정원일에 별 관심이 없다. 전 주인은 나이가 많은 노부부였다. 오래도록 정원을 가꾸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땅이 메말라서 무얼 심어도 잘 자라지 않았다. 잔디는 노랗게 변해 가고 있었다. 봄이 되면 앞집, 옆집 잔디는 녹색으로 변하는데 우리 집은 여전히 노랬다. 남편은 흙을 다 뒤집어 새로 잔디씨를 뿌렸다. 날마다 물을 주었다. 일 년이 지나지 않아 다시 잡초로 뒤덮였다. 마음이 아팠다. 뜨거운 여름 내내 땅을 뒤집어엎느라 남편이 너무 고생했기 때문이다. 올해 다시 땅을 고르고 잔디씨도 다시 뿌렸다. 남편은 어디선가 잔디를 통째로 뽑아 와서 심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싹이 조금씩 자라 초록색 잔디가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은 매우 기뻐했다. 자기가 여름 내내 고생해서 가꾸었으니 기쁘기도 하겠지. 일 때문에 일주일씩 집을 비워야 할 때면 날마다 전화를 했다. 물 주는 것 잊지 말라고 하하.
최근에 나는 사람들로 인해 힘든 일이 있었다. 사실 많이 힘들었다. 화가 올라오고 억울하고 복수심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즈음부터 아름다운 자연이 많이 나오는 영화나 영상이 보고 싶어졌다. 어딘가 산으로 들로 떠나가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오늘은 오래전 보았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을 다시 보았다. 미국 몬타나주의 아름다운 배경이 영화를 보는 내내 아련한 느낌을 갖게 한다. 강에서 flying 낚시를 하는 폴의 모습은 늘 감동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폴은 왜 그랬을까 하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지만 그 생각은 잠시 미뤄두었다. 영화 속의 아름다운 자연들이 사람에게 지친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는 느낌이다. 어딘가 산골짜기 오두막으로 가서 며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남편은 나와 다투고 나면 뒤뜰로 가서 한동안 머무른다. 전에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싸우면 화해를 해야지 왜 온종일 밖에서 저러고 있을까? 요즈음 남편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남편은 다툼으로 지친 마음을 위로받으려고 자연의 품 속으로 도망친 거였다. 꽃과 나무들 속에 몸을 맡기고 치유를 했던 거였다. 영화 속의 자연이라도 보면서 위로받으려고 하는 나를 보며 아, 그런 거였어, 비로소 남편을 이해했다.
내친 김에 오후에 뒤뜰로 나가보았다. 교회에서 가져온 장미나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코스모스, 여름에 실컷 따먹었던 고추나무가 아직 남아있다. 포도나무 덩굴이 거실 창문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창문 너머로 보인다. 내년엔 포도를 좀 따 먹을 수 있으려나. 깻잎은 다 시들어 온데간데 없어졌다. 내년에 다시 나오겠지. 새삼스레 남편의 수고가 느껴졌다. 정원이 있다는 게 감사했다. 난 왜 이 좋은 것을 그동안 몰랐을까. 사느라 바빠서 우리 집에 있는 꽃에, 나무에 눈길 한번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내가 이제야 자연의 포근함을 알게 된 것을 보면 어지간히 사람한테 부대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