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your enermy, Grace."
"Okay, then I love you very much."
하하하 어린아이들마냥 웃는다.
W는 성경을 읽다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절에 꽂혔는지 볼 때마다 놀린다.
W는 투석실에서 같이 일하는 남자 간호사다. 툴툴거리면서도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는 착한 동료이다. 그도 나도 서투른 영어로 한없이 이야기한다. 아이들 이야기, 차 보험료 이야기,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
오늘 아침, break room에서 투석 기계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며 잠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십여 년전 미국에 막 도착해서 첫 일 년이 오늘의 주제였다. 필리핀에서 에이젼시를 통해서 간호사로 취업하기로 하고 미국에 온 가족이 들어왔는데 정작 취업하게 된 곳은 일본 초밥 레스토랑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애초에 약속했던 페이의 절반도 안되게 받으며 일 년동안 일을 했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커다란 밥솥을 닦는 일이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낯선 땅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얼마 후에 에이젼시를 바꿔 본래 지업인 간호사로 일하게 되었고, 지금은 뉴욕 업스테이트에 커다란 집도 마련하고 가족들과 여행도 많이 다닌다.
W의 얘기를 들으며 내가 처음 미국땅을 밟았던 때가 떠올랐다. 몹시 추웠던 2009 년 겨울 JFK 공항에서 바라보는 바깥풍경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설어서 정신이 없는데 춥기까지 하니 더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열개가 넘는 이민가방을 찾아서 나오자 이민국 오피스로 가라고 했다. 남편과 나. 그리고 세 딸들은 사무실에 나란히 앉아 허리에 총을 찬 경찰들을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쳐다보며 떨고 있었다. 친절하지 않은 명령조의 말투가 더욱 나라를 떠나 온 죄인들로 만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민 생활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춥고 외로웠다. 오월에도 방바닥은 여전히 차가웠다. 한국의 온돌이 너무나 그리웠다. 아파서 신문 광고를 보고 한국의사라는 말에 찾아갔는데 하필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한국의사였다. 제대로 설명도 하지 못하고 백오십 불을 내고 처방전 하나를 받아 나오면서 결국 눈물이 터졌었다. 서러웠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이 쓸쓸한 나라에서 앞으로 어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었다.
그랬던 나와 내 가족이 지금은 미국의 평범한 소시민을 흉내 내며 살아가고 있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장도 보고, 외식도 하며, 일상이 흘러간다. 집에서 한국 TV를 보고 있노라면 여기가 한국인지 미국인지 헷갈린다.
그러나 여전히 불편하다. 어느 소설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이민은 평생토록 임신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읽으면서 격렬하게 동의했던 기억이 있다. 뭔지 모르지만 조금은 불편한 상태로 살아간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그 불편함에 익숙해져서 느끼지도 못한 채 살아갈 뿐이다.
오늘도 W와 한바탕 농담을 하며 웃고 떠들다가 집에 왔다. W도 나도 낯선 나라에 가족들과 함께 이민자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다. 나라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지만 우리는 이민자라는 공통점으로 서로에게 말없이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