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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의 한국 간호사들

by 얄미운 하마

투석실에서 일하다 보면 가끔 수술실에 가서 투석을 해야 할 경우가 있다. 간이식을 할 때 수술 도중에 투석이 필요한 것이다. 간이식 중 악화될 수 있는 소변량 저하나, 전해질 불균형, 체액 과부하 안정화를 돕기 위해서이다.


얼마 전에도 수술실에서 투석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왔다. 수술실에서 투석을 하는 것은 여간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 아니다.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면 온통 새로운 것들 투성이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 Sterile field에 혹여나 닿을까 나도 수술장 간호사들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런 수술실에서 투석기계를 설치하는 과정이 쉽지가 않다. 그날도 수술실에 들어가서 기계를 설치하고 있는데 낯익은 동양인 간호사들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니, "안녕하세요? 혹시 한국분이세요?" 한다. "네, 한국분들?" 나도 눈을 반짝였다.


세 사람 모두 한국인 간호사라고 소개를 한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셋 모두가 한국사람? 반가웠다. 마스크를 쓰고 스크럽으로 감싸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반가워서 잠깐 동안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병원은 뉴욕시티에 있는 병원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 많지 않다. 간간히 한국사람들 얼굴이 보이면 눈인사를 하며 지나가는 정도이다. 수술실에서는 더더군다나 본 적이 없어 반가웠다. 기계를 다 설치하고 중환자실 간호사가 와서 인계를 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의자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라인 설치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다. 수술방을 나오면서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연락할게요 하며 헤어졌다.


나오자마자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000 간호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나도 정말 반가워요."


언제 한 번 식사라도 하면 좋겠다.




옛날 같지는 않아서 한국 사람들 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병원에서 만나면 반갑다. 사느라 바빠 잊어버리고 살지만 기회가 되면 함께 식사하며 살아가는 얘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한인교회에 가면 온통 한국사람들이다. 교회를 다닌 지 십여 년이 넘어간다. 거의 다 한국 사람인 교회에서 나는 또 이상한 외로움을 느낀다.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많은데 외로운 이유가 뭘까?


아마도 이민 온 시기가 다르면 경험도 다르고, 느끼는 것도 다르고 하다 보니,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미국으로 온 가족이 입국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 가족보다 2-3년 먼저 온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토들러가 신생아랑 놀 수는 없잖아요."

자신을 토들러로 표현했다. 영어로 toddler는 한 살에서 세 살 정도의 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인즉슨, 이제 막 태어난 아기와 그래도 이 년 정도 된 사람과는 다르니, 같이 놀 수는 없다는 뜻인 걸 나중에 알았다.


실제로 막 이민으로 태어나 모든 것이 낯선 나와 내 가족들이 그 친구에게는 답답하고 짐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다. 솔직히 그 당시에는 '뭔 말이야?' 했었다. 간접적인 표현을 못 알아듣고 섭섭해만 했던 기억이 난다.


이민자들이 이민을 온 시기에 멈추게 된다는 말이 있다. 70년대, 80년대 이민 온 사람들과 2000년대에 이민을 온 사람들은 당연히 다를 것이다.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사고와 생활 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지금까지 사는 경우가 많다. 몸은 이 미국 땅에 있지만 생각과 마음은 7,80년대 한국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얼굴은 다들 한국 사람이지만 다른 생각들을 하며 사는 것이다. 부모세대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자녀세대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 싶다.


우리 집만 해도 그렇다. 사십 대 중반에 온 남편과 나, 중학교 졸업하고 온 큰딸과 작은 딸, 초등학교 3학년 때 온 우리 막내가 다 다른 경험들을 하고, 다른 어려움을 겪었다. 막내는 어려을 때 와서 그런지 영어를 배우는데 빨랐고 친구들도 다양한 나라 사람들을 사귀었다. 첫째와 둘째는 일단 영어를 배우는 게 어려웠고, 친구를 사귀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갑자기 환경이 바뀌어 아이들이 겪었을 어려움을 당시에는 나도 정신이 없을 때라 신경 쓰지 못했다. 십 년 정도 흐른 후, 아이들이 아픔을 호소하기 시작해서야 아이들의 깊은 상처를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경험한 인종 차별, 미국 학교에 다 좋은 선생님, 학생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가 심리 상담을 받으며 가장 두려운 장소를 다시 가보는 시도를 했는데, 그곳이 바로 학교버스였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랬었구나, 몰랐다. 나는 나대로 직장에서 살아남느라 고군분투하던 때라 아이들의 어려움을 알지 못했다.




수술실에서 본 한국 간호사들 생각하다가 생각이 여기까지 흘렀다. 000 간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이에게 문자를 했다. 시간 되면 같이 밥 먹어요라고. 그중 한 명은 미국에 온 지 이 년 정도 되었다고 했는데 한 참 적응하는 중일 것이다. 신생아를 거쳐, 토들러, 사춘기로 들어가고 계속 성장할 것이다.


'토들러가 신생아랑 놀 순 없잖아요'가 아니라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로서,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준다면 외로운 이민 생활이 조금 풍성해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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