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엄마는 친척 모임이든 동네 계모임이든 항상 목소리가 제일 컸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곳저곳을 누비며 자리를 이끄는 데 늘 바쁜 모습이었다.
엄마가 세탁소를 할 때는 항상 밤 10시에 문을 닫았는데, 그 시간이 되면 하루의 마무리라는 느낌보다는,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엄마 가게(이자 우리 집)는 큰 골목에 있었는데, 10시 즈음이면 골목의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동시에 상인들의 개인적인 밤이 시작되었다. 길가에 좌판을 펼치고, 갖가지 음식과 맥주로 그들은 피로도 풀고 회포도 풀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나는 그때의 분위기와 그 동네가 참 좋았다. 길을 가면 누구든 내 이름을 불렀고, 심지어 우리 엄마조차 내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동네 사람들은 아이들을, 그리고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석 달에 한 번쯤은 엄마가 동네 아줌마들과 외출하는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우리 집에 동네 아이들이 모여 TV를 늦게까지 보거나 놀이를 해도 괜찮은 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밤이 싫을 때도 있었다. 엄마가 새벽녘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아빠의 눈동자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대체로 엄마를 이해했지만, 너무 늦게 오는 날이면 그 진하고 숱 많은 눈썹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화를 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끼리 보내는 밤이 좋기도 했지만, 엄마가 너무 늦지 않을까 걱정하며 그런 밤들을 보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늘 하던 말이 있었다. “놀 때, 일할 때, 그리고 공부할 때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하던 사람이 우리 엄마였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늘 중상위권을 유지하던 나는 여느 학생들처럼 수시 지원을 했다. 내가 가고 싶었던 학교는 서울에 있는 언론학과였다. 지원서를 넣고 논술 시험을 치르러 서울에 가야 했는데, 당연히 서울에서 청춘을 보낸 프로 서울러(?) 엄마와 동행했다.
고3 수험생이었던 나는 서울에 도착해 한 해 선배인 K오빠와 캠퍼스 투어를 하기로 했고, 엄마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다가 우리와 만나기로 했다.
밤이 되어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당시 K오빠는 엄마와 한두 차례 인사를 하긴 했지만, 그날처럼 오래 본 건 처음이었다. 엄마는 미팅 포인트에 나오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엄마와 엄마 친구들이 있는 bar로 갔다), 이미 술에 취해 많이 업된 상태였다.
사랑 넘치는 엄마 친구들은 나를 보자마자 뽀뽀를 퍼붓고 용돈도 주셨다. 10대였던 나는 그 모습이 K오빠 앞에서 부끄럽기도 하고, 엄마와 엄마 친구들의 열정(?)을 보고 있자니 어안이 벙벙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이야기는 엄마를 놀릴 수 있는 단골 소재다. 딸 시험 전날 만취한 엄마 썰 정도랄까.
어쨌든 우리 엄마는 자신의 모토처럼 정말 열심히 일했고, 최선을 다해 놀았다.
그리고 20대가 되어 무역회사 해외영업부에 들어간 나는, 엄마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회사에서 유독 친하게 지낸 삼총사가 있었는데, 돌이켜봐도 다시없을 만큼 진하게 놀았다. 나 역시 엄마처럼 20대의 일부를 서울에서 홀로 보내며, 최선을 다해 일하고 인생을 즐겼다.
그런 시절을 보냈기에, 엄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친구들과 재밌는 추억을 쌓으면, 나이가 들어도 그 친구들은 늙지 않고 늘 그 모습으로 남아 있는 법이니까.
아마 내가 19살 때 봤던 엄마와 엄마 친구들의 모습은 내게 40대 아줌마들의 반란처럼 보였겠지만, 엄마에게는 그 시절 20대 아가씨들의 시즌2 정도였으리라.
이제 몇 년 후면, 이 밤문화 DNA를 또 누가 물려받았을지 지켜볼 생각에 두근두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