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by 트래거

부엌 작은 창에 바나나를 두었다

아직 끝이 푸른 초록빛이었다

하나를 벗겨서

입에 넣으니

달달함이 아닌

혀끝을 건드리는 떫은 맛이 스며들었다

그게 사랑의 시작이었나 보다


사랑을 처음으로 시작할 때는

빛나는 노란 햇살이지만

그 속은 아직 설익은 계절이

숨 쉰다


며칠이 지나자

바나나는 노랗게 물들어 갔다

마치 조금씩 채워지는 연인들의

모습처럼


그 위로 검은 점들이 하나 둘 떨어진다.

누군가는 병든 거라 말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세월이 남긴 잉크의 고백이라는 것을


검은 점은 깊어지고

노랑은 점점 사라졌다

마침내

장례식장에서 검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그녀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달콤한 향기를 남기고

아무 말 없이 떠났다

그 계절도 그렇게 여느때와 같이 지나갔다

텅빈 마음도 함께


남아 있는 건 껍질뿐

그러나 그 껍질마저도

쥐고 있으면

온기의 추억들이 그 자리에서

손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