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 시간 맞춰 왔는데 왜 기다려야 돼요!?
털북숭이 가족과 함께 살아가며 생기는 흔한 오해-32
여러분 털북숭이의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러 갈 때 예약을 잡고 가시나요? 물론 예약 시스템이 없는 병원도 있겠지만 아마 많은 동물 병원들이 예약을 잡고 있을 거예요. 이러한 병원에서는 주로 적극적으로 예약 시간을 잡아요. 예약을 잡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예약일 전날이나 당일에 자동으로 문자가 가게끔 프로그램을 세팅해두죠. 그래서 보호자분이 예약을 잊지 않고 병원에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요.
병원에서 이렇게 열심히 예약을 잡는 이유는 다음 재진일에 잊지 말고 오게끔 상기시키는 것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건 보호자와 환자의 병원 내 대기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예요.(그리고 이를 통해서 병원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함도 있지요.)
회사가 많이 입주해있는 지역의 식당을 점심시간에 방문해 보셨나요? 다른 유명 식당들도 마찬가지긴 하겠지만 특히나 회사 근처 식당은 몰리는 시간과 아닌 시간이 극명하게 나뉘어요. 카페도 마찬가지예요. 출근 시간대와 점심시간 대에 엄청난 대기 인파가 생겨요.
식당이나 카페만큼은 아니지만 동물 병원도 이와 비슷하게 몰리는 시간대가 있어요. 물론 병원 주변 인프라에 따라 이는 좀 다를 듯 하지만, 저희 병원의 경우 토요일, 일요일이 가장 대기 시간이 길어요. 아무래도 직장 다니시는 보호자분들은 평일에 동물 병원에 방문하기 힘들어서 그런 거 같아요. 그리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엔 병원이 한가해요. 이런 날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기에 쉽지 않은 환경이라 그래요.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모두가 힘들어져요. 대다수의 털북숭이들에게 동물 병원은 그리 좋은 기억을 주는 공간이 아니에요. 그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겐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죠. 게다가 다른 강아지나 낯선 사람을 싫어하는 아이들에겐 특히나 더욱 힘든 시간이 될 거예요.
스트레스받는 털북숭이로 인해 보호자 분도 힘들어져요. 다른 아이와 혹시 싸우기라도 할까 걱정하고 병원에만 오면 부르르 떠는 아이를 꼭 안고 달래느라 진땀을 빼죠.
환자와 보호자분이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 알고 있는 저희로서도 대기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를 써요. 상담을 좀 더 빠르게 진행하고 화장실 갈 시간이나 식사 시간을 줄여가면서 노력해요.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게 보호자분들을 위한 책자나 영상을 준비해 두죠. (지루해하는 털북숭이를 위한 준비는 뭐가 있을까요? 위생상의 문제로 장난감을 두기는 어렵고... 항상 고민되는 부분이에요.)
예약 시간을 설정하면 이러한 대기 시간을 감소시킬 수 있어요. 예약 없이 찾아오시는 분들의 시간을 저희가 분산시킬 순 없지만 예약 환자의 경우 보호자 분과 주치의의 스케줄을 맞춰보고 분산이 가능하죠. 오래 걸리는 아이는 사람이 덜 붐비는 시간에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 두고, 금방 끝날 아이는 짧은 여유 시간에 잡아두죠. 모두가 해피해지는 거예요.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어요. 바로 예약 시간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다르다는 거예요.
보호자 분들은 대개 예약 시간이 진료 시작 시간이라고 생각하세요. 너무나 당연한 말 같죠. '예약 시간에 진료를 시작해야지, 그럼 도대체 왜 예약을 잡아!?' 이런 생각이 드실 거예요.
네, 충분히 이해해요. 저희도 그렇게 되게끔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동물 병원의 특성상 이를 지키기가 너무 어려워요.
우선 반려 동물의 특성상 증상만 가지고 진료 시간을 예상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예를 들어 털북숭이가 구토를 해서 병원에 예약을 잡았다고 생각해 보죠. 상담을 해보니 빈 속인 상태가 지속되어 나타나는 공복성 구토였어요. 그러면 딱히 처치할 것 없이 관련 내용을 설명해 드리고 간단하게 마무리될 거예요. 심하지 않다면 약도 필요 없고 그저 식사 패턴만 바꿔도 돼요. 이 모든 과정은 10분이면 충분하죠.
그런데 똑같이 구토로 예약하고 온 아이가 있어요. 상담을 해보니 구토 횟수나 양이 심상치가 않아요. 방사선과 초음파 검사를 통해 이물질이 위 내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갑자기 응급 수술을 하게 돼요. 그럼 못해도 2시간은 필요할 거예요. 이렇듯 같은 구토라 할 지라도 걸리는 진료 시간은 그 원인에 따라 천차만별이에요.
똑같은 검사를 한다 해도 아이의 성향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소요되는 경우도 있어요. 신체검사, 채혈, 방사선 검사, 초음파 검사 등 병원에서 진행되는 여러 검사들은 고유의 자세를 일정 시간 동안 유지해야 해요. 사람이야 말을 잘 들으니 의사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하죠. 털북숭이들은 달라요.
간혹 얌전하고 협조적인 아이는 정말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얌전히 누워있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검사를 거부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방사선을 찍기 위해 눕혀 놓으면 마치 갓 잡은 생선처럼 파닥파닥 온몸으로 몸부림치는 아이들이 있죠. 이렇게 계속 움직이면 검사가 아예 불가능해요. 그렇다고 이런 아이들을 힘으로 꽉 잡으면 대개 더욱 맹렬히 몸부림치고 대소변을 보거나 관절에 손상을 입기도 해요. 결국은 어르고 달래고 최대한 덜 불편하게 하는 수밖에 없죠. 그래도 안 되면 결국 진정제를 투여하는 방법을 써야 해요.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기에 아이의 성향에 따라서도 진료 시간이 달라지게 돼요.
게다가 예약 없이 오는 아이들도 많아요. 갑자기 아파하는 아이의 진료를 보기 위해 몇 시간 혹은 며칠 뒤 예약을 잡고 그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순 없잖아요. 이렇듯 기존 예약 환자의 진료 시간이 예상외로 길어지고 중간에 예약 없이 응급으로 오는 아이들까지 겹치면 다음 예약 환자들의 대기시간이 길어지게 돼요. 이러면 예약 시간에 맞춰서 오신 분들께는 참 죄송하죠. 저희도 정말 최선을 다해 예약 시간에 맞춰 진료를 들어가려고 해요. 그런데 정말 아무리 노력해도 어려울 때가 있어요.
너무나 감사하게도 저희 상황을 이해해 주시고 예약 시간에 맞춰 오신 후 1시간 가까이 기다리셔도 '오늘은 병원이 좀 바쁘네요, 하하하' 하고 웃어넘기는 분들이 계세요. 반면에 예약 시간으로부터 5분도 채 지나기 전에 접수처 선생님께 화를 내며 예약 시간 지났는데 왜 진료 안 들어가냐고 화내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예약 시간에 딱 시간 맞춰 들어갈 수 없는 여러 이유들에 대해 이해해 주신다면 '예약 시간'에 대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예약 시간이라 함은, 그 시간에 진료를 시작하겠다는 약속 시간이 아니에요. 그 시간에 해당 아이가 진료 대기 1순위가 되는 진료 우선권이 주어지는 거예요. 예약하지 않고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던 아이들보다 먼저 진료를 들어가게끔 한다는 뜻으로 생각해 주세요. 그리고, 저희 병원 스텝들도 여러분들의 예약 시간에 맞춰 진료가 시작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도 기억해 주세요.
간혹 대기 0순위인 아이들이 있어요. 예약 시간에 맞춰 온 털북숭이보다 예약도 없이 더 늦게 왔는데 먼저 진료를 들어가는 상황! 바로 응급 상황이죠. 응급 상황인 아이에겐 양보를 부탁드려요. 그럴 일이 없으면 더욱 좋겠지만 만에 하나 내 아이가 응급 상황이 돼도 똑같이 0순위가 되어 진료를 보게 될 테니까요. 단 응급상황이냐 아니냐에 대한 판단은 수의사가 내려야 하겠죠!?
만약 내가 다니는 병원은 매번 예약 시간에 가도 계속 기다리게 된다면!? 예약 잡기 전에 한 번 물어보세요. 어느 시간이 가장 한가한지. 보통 진료 시작 후 첫 예약은 대기가 거의 없어요. 대기가 있을 수가 없죠. 24시간 병원이라면 주치의 선생님 출근 직후 시간대를 노리는 게 가장 확실할 거예요. 저희 병원엔 바로 옆에 좋은 산책길이 있어 대기 시간이 길어질 경우 아이와 함께 가볍게 산책을 다녀오시는 분들도 계세요. 병원과 합의만 가능하다면 이런 방법도 괜찮지 않을까요?
병원 자체에서 예약을 받지 않는 곳들도 있어요. 제 선배님의 병원도 예약 시스템을 아예 없애버렸다고 하더군요. 이유를 물어보니 대기 손님이 워낙 많은데 사전 연락도 없이 예약 시간에 오지 않는 노쇼(no-show) 환자분이 너무 많아져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요새는 노쇼 환자분들이 많이 줄어들고 있어요. 이전에 비해 예약 시간에 맞춰 오시거나 미리 전화로 예약 취소나 변경 요청을 하시는 분들이 늘어났어요. 여러분들도 이런 매너 있는 분들일 거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