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돔 아래의
러시아 정교회 쇄신운동

세게속의 러시아 정교회

by 이헌철
image.png 성 삼위일체 교회의 알렉세이 우민스키 시제 @seoulwire.com/news/articleView.html?idxno=528332

1990년 9월9일, 모스크바 근교 세모조프 마을, 일요일 아침. 나무들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알렉산더 멘 신부는 평소처럼 자택에서 교회로 가는 숲길을 걷고 있었다. 20년간 섬겨온 작은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누군가 도끼를 내려쳤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기 직전, 무신론 국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사상가였다. 범인은 지금까지 잡히지 않았다. KGB인지, 정교회 극단주의자인지, 단순 강도인지 아무도 모른다.

2023년 1월13일, 모스크바 성 삼위일체 교회의 알렉세이 우민스키 시제에게 법원의 판결문이 도착했다. "사제직 박탈." 교회법정의 또 다른 도끼였다. 그의 죄목은? ‘전쟁 기도문 거부’였다.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 키릴은 모든 교회에 ‘성스러운 루시의 승리를 위한 기도’를 의무적으로 드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우민스키 사제는 신도들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승리보다 평화를 위해 더 기도하십시오.”

첫 번째 도끼는 한 사람의 몸을 쓰러뜨렸지만, 두 번째 도끼는 한 사람의 사역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두 도끼 모두 같은 것 즉 러시아 정교회 안에서, 천 년의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무신론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신앙

1935년1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의 ‘무신론 5개년 계획’이 한창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지도에서 지우려는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였다. 교회는 폐쇄되고, 사제는 체포되고, 이콘은 불태워졌다. 바로 그 순간, 생후 6개월의 유대인 아기가 지하교회에서 몰래 세례를 받았다. 카타콤 교회—국가 통제를 거부한 러시아 정교회의 은밀한 분파—의 어두운 지하실에서 어머니는 아기를 물에 담그며 속삭였다. “알렉산더” 수호자라는 뜻이었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58년, 종교적 신념 때문에 대학에서 쫓겨난 지 한 달 만에 그는 부제가 되었다. 소비에트는 그에게서 학위를 빼앗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강단을 주었다. 30여 년간 KGB의 감시를 받으며, 집은 수색 당하고 경찰서에 끌려가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학자 세르게이 아베린체프가 알렉산더 멘을 두고 묘사한 표현이다. “그는 소비에트 지식인이라는 야만 부족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선교사이다.” 날카롭지만 정확했다. 1970-80년대 마르크스주의라는 거대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있었다. 브레즈네프의 침체기, 아프가니스탄 전쟁, 체르노빌 참사, 국가가 약속했던 밝은 미래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빈자리를 채울 것은 없었다. 70년간의 무신론 선전은 러시아 영혼에 깊은 굶주림을 남겼다. 사람들은 빵이 아니라 의미에 배고팠다. 과학이 아니라 신비에 목말랐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진리를 갈망했다.

멘은 그들의 언어로 말했다. 그 자신이 지식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상식에 근거한 신비주의’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존재를 수학 공식처럼 증명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했다. 동시에 신앙과 이성이 적이 아니라 동반자이고, 종교와 과학이 같은 진리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임을 역사와 철학으로 보여주었다.


땅 밑에서 퍼진 책들

1969년 출판된 『인자』(Son of Man)는 수천 명의 소비에트 시민들에게 예수를 소개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출판할 수 없었다. 브뤼셀에서 가짜 이름 "A. 보고몰로프"로 출판해야 했다. 그러나 책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퍼져나갔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손에서 손으로, 몰래 복사되고, 은밀하게 전달되고, 속삭임으로 추천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아서』(In Search of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였다. 6권짜리 방대한 종교사였다. 불교부터 조로아스터교까지, 고대 이집트부터 현대까지의 종교역사를 다룬 책이었다. 저자인 멘은 여기서 대담한 시도를 했다. 다양한 종교 전통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인류의 보편적 갈망을 추적한 것이다. 그의 사후 20년간 그의 저작들은 무려 500만 부 이상 팔렸다.

모스크바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노바야 데레브냐라는 평범한 시골 마을의 평범한 교회에는 일요일마다 평범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젊은이들과 대학생들이 왔다. 지식인들이 왔다. 걸어서가 아니라 기차를 타고 왔다. 당시 대부분의 러시아 사제들은 의례만 집전하고 조용히 지냈다.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KGB가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설교하는 것은 위험했다. 질문에 답하기에는 더욱 위험했다. 그저 십자가 긋고, 향 피우고, 예배 노래 부르고, 조용히 집에 가는 것, 그것이 소비에트 시대 사제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러나 멘은 달랐다. 그는 예수에 대해, 복음에 대해, 한 인간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경험하는 새로운 탄생에 대해 설교했다. 30분이 아니라 한 시간을 설교했다. 예배 후에도 사람들은 남아 질문하고, 토론하고, 논쟁했다.

더 급진적인 것은 멘이 신도들의 집에서 작은 모임을 조직했다는 것이다. 기도 모임이었다. 당시 교회 건물 밖에서, 사제 없이 신도들이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러시아에서 유일무이했다. KGB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멘은 멈추지 않았다. 어떤 성직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

“멘은 위대했다. 그는 무신론적 지식인들과 함께 일하는 가장 무거운 짐을 떠맡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질문하고, 쉬운 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멘은 그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언어로 그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 그리고 짧은 봄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가져온 짧은 자유의 순간이 있었다. 70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들은 말할 수 있었고, 질문할 수 있었고, 의심할 수 있었고, 그리고 믿을 수 있었다. 멘에게 전국TV 프로그램 제안이 들어왔다. 그는 거의 매일 여러 클럽, 대학, 문화회관에서 강연했다. 젊은이들은 신에 대한 믿음을 갈망했다. 각계각층에서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에너지가 폭발했다. 70년간 억눌렸던 모든 것이 쏟아져 나왔다.

image.png 1987년 중거리핵전력(INF)에 서명하는 레이건 당시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이에 따라 미사일 수천 개가 폐기됐다. @bbc.com/korean/features-62733685

1990년, 멘은 러시아 성서협회 공동 창립을 하고, 정교회 개방대학 설립하고, 『성경의 세계』 저널 창간했다. 소련 최초의 주일학교를 시작했고, 아동병원 지원 자선단체 설립했다. 끝없이 일했다. 소비에트 신문 『사회주의 산업』은 그를 ‘소비에트 지식인층에 대한 현대의 사도’라고 불렀다. 무신론 국가의 공식 언론이, 한 사제를 사도라고 부른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참수를 기념하는 날 1990년 9월9일, 일요일 아침7시40분 자택 근처 숲길에서 멘은 도끼를 맞았다.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았다. 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구급차를 불렀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의식을 잃었고,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9월12일에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정교회 달력에서 세례자 요한의 참수를 기념하는 날이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목소리가 권력자에게 진리를 말하다 죽임 당한 예언자를 기념하는 날이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경찰은 용의자를 체포했다. 자백도 받았다. 그러나 증거가 없다고 석방했다.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누가, 왜 그를 죽였는가?

KGB의 소행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멘은 오랫동안 감시 대상이었다. 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고 있었다. 정교회 극단주의자의 범행이라는 설도 있었다. 멘은 유대인이었다. 많은 유대인 지식인을 개종시켰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이를 ‘유대인의 음모’로 보았다. 단순 강도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훔쳐가지 않았다. 지갑도, 시계도 그대로였다.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들은 멘의 목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가까운 제자인 알렉산더 보리소프 신부는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대다수 국민이 자랑스러워 할 것입니다. 소비에트 체제라는 환경 아래서, 모든 것이 멘 신부 같은 사람의 출현을 반대했던 그런 환경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훌륭한 사람이 살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계속되는 쇄신의 물결

멘의 죽음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쇄신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심은 씨앗은 지금도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극적으로 자라고 있다.

1991년8월. 소비에트 연방이 마지막 숨을 쉬고 있었다. 보수파 쿠데타가 일어났다. 탱크가 모스크바 거리를 점령했다. 위기의 순간, 정교회 총대주교 알렉시 2세가 군대에 직접 호소했다. “우리 민족 전체에게 지지를 보여주십시오. 특히 우리 군대에게 호소합니다. 형제의 피를 흘리지 마십시오.” 군대는 총을 내렸다. 쿠데타는 실패했다. 교회의 도덕적 권위가 역사를 바꾼 순간이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정교회는 부활의 봄을 맞았다. 23,000개의 교회가 소비에트 시대에 파괴되거나 방치되었다. 이제 재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었다.

평신도 운동의 폭발이 일어났다. 정교회 형제회 연합(Union of Orthodox Fellowships)이 창립되었다. 전국의 풀뿌리 기독교 이니셔티브를 하나로 묶는 네트워크였다. 선교, 자선, 청년 사역이 70년 만에 처음으로 평신도들이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성경 연구 그룹이 생겼다. 멘이 했던 것처럼, 신도들의 집에서, 사제 없이도, 사람들이 모여 말씀을 읽고 토론했다. 이것은 러시아 정교회 전통에서는 혁명적이었다.

새로운 순교자들의 시성이 시작되었다. 소비에트 박해 중 죽임당한 사제들, 주교들, 평신도들,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몇 년 전까지 위험했다. 이제 그들은 성인이 되었다. 1917년부터 1935년 사이 95,000명의 정교회 사제가 처형되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마침내 빛을 보기 시작했다.

주일학교가 생겼다. 소련시대 70년 동안 어린이들에게 종교를 가르치는 것은 불법이었다. 이제 아이들이 성경 이야기를 듣고, 이콘을 그리고, 찬송을 배웠다.

2000년, 희년 주교회의(Jubilee Bishops' Council)에서 총대주교청 청년부 설립이라는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러시아 정교회가 공식적으로 청년 사역을 우선순위로 삼은 것이다. 위기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1년 러시아 성인의 31%만이 자신을 정교회 신자라고 답했다. 2008년에는 72%로 증가했다. 놀라운 성장이었다. 그러나 실제 교회 출석율은 아직 7%다. 사람들은 ‘정교회 정체성’을 받아들였지만 신앙으로 살지는 않았다. 문화적 정교회 신자들이다. 세례는 받지만 예배는 드리지 않고, 이콘은 집에 걸지만 성경은 읽지 않고 있다.

2014년에는 ‘소로친스키 모임(Sorochinsky Meetings)’이 시작되었다. 유명 성직자, 학자, 운동선수, 예술가, 문화인이 모이는 대규모 집회이다. 짧은 시간에 청년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하이라이트는 마라톤 대회였다.

2016년, 일본 선교사였던 성 니콜라이 아폰스키의 탄생 축일 180주년 기념 마라톤 대회였다. 500명의 청년이 등록했다. 모스크바 강변을 달렸다. 기도로 시작하고, 성가로 마쳤다. 정교회 청년들이 시대에 발맞추고 있음을 사회에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오늘날 소록 소로코프는 약10,000명의 다국적 멤버를 거느린다. 자원봉사 활동, 순례 여행, 사회 프로젝트. 2015년에는 자매조직(Sisterhood)도 창립했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

소비에트 시대 러시아 정교회는 의례와 전통에 집중했지만 성경은 멀어졌다. 성경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까지 러시아어 성경을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1990년, 러시아 성서협회가 재건되었다. 성경이 대량으로 인쇄되고 배포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아처럼 사람들이 성경을 구했다. 새로운 세대의 사제들은 설교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성경 연구 그룹이 교회마다 생겼다. 스툰디즘(Stundism – 독일 경건주의에서 유래한 성경 연구 운동)의 영향을 받은 방식이었다. 개신교적이라고 비판받기도 했지만, 계속되었다. 주일학교 커리큘럼이 성경 중심으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교리문답과 교회사 중심이었다. 이제 어린이들이 먼저 성경 이야기를 배운다. 신학교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과거에는 교부 문헌과 예배학 중심이었다. 이제 성경신학 과목이 강화되었다.


선교의 재발견

천년 동안 러시아 정교회는‘국가교회’였다. 선교는 필요 없었다. 모두가 정교회 신자였으니까. 세례는 시민권의 일부였다. 이제 러시아 정교회는 선교도 해야 했다. 2010년, 총대주교 키릴은 선언했다. “젊은이들의 도덕적 양육은 현대 교회 생활의 우선 방향입니다.” 청년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2개월 집중 과정에 100명이 첫 과정에 등록했다.

모스크바 주교구는 선교 전략을 개발했다. 거리 전도, 대학 캠퍼스 사역, 인터넷 선교, 과거 정교회에는 없던 것들이었다. 정교회 웹사이트들이 생겼다. Pravmir.com, Pravoslavie.ru가 생겼다. 질문과 답변, 성인 이야기, 신앙 간증, 개신교 스타일의 접근이지만, 정교회 내용이었다.

알렉세이 우민스키– 평화를 위해 기도한 죄

1963년생. 알렉세이 우민스키는 평범한 소비에트 엔지니어 가정에서 프랑스어 교사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대학에서 인생이 바뀌었다. 로마노-게르만 문헌학과에서 신자들을 만났다. 복음을 읽기 시작했다. 1980년 세례 받고 1990년 부제 서품을 받았다. 첫 사역지는 클린의 공동묘지 교회였다. 멘이 1989년까지 사역했던 바로 그 도시였다. 우연이었을까? 이후 카시라의 우스펜스키 대성당 주임사제였고, 모스크바 성 블라디미르 교회 사제였다. 정교회 학교 교장 6년간TV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유명해졌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설교자로 솔직하고, 지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러시아 성직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2000년대와 2010년대 내내, 우민스키는 모스크바 호흘로프스키 성 삼위일체 교회에서 활발한 공동체를 구축했다. 멘이 했던 것처럼. 지적인 청년들이 찾아왔다. 질문하고, 논쟁하고, 성장하는 공동체를 인도했다. 그는 또한 ‘등대의 집’ 어린이 호스피스를 위해 일했다. 직접 모스크바와 모스크바 지역을 돌아다니며 임종하는 어린이들에게 성찬을 주었다. 병원의 중증 환자들을 방문했다. 호스피스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을 지원했다.

그러다 2022년 2월24일이 왔다.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시 총대주교 키릴은 전쟁을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불렀다. 러시아 정교회 지도부는 침공을 지지했다. ‘성스러운 루시의 승리를 위한 기도’를 모든 교회에서 의무적으로 드리도록 명령했다. 많은 사제들이 괴로워했다. 어떻게 우크라이나 정교회 신자들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을 축복할 수 있는가? 그들도 정교회 형제자매가 아닌가? 2023년 5월, 요한 코발 신부가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전쟁 기도문에서 ‘승리’ 대신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는 죄로 사제직이 박탈당했다.

우민스키는 더 조심스러웠지만, 더 공개적이었다. 그는 신도들에게 권고했다. “승리보다 평화를 위해 더 기도하십시오.” TV 인터뷰에서 말했다.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같은 교회의 자녀입니다. 어느 한쪽만 지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회 법정이 소집되었다. 우민스키는 세 번의 심리에 모두 불참했다. 2023년 1월13일, 세 번째 심리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사도 규칙25조에 따라, 알렉세이 우민스키 신부는 사제 서약 위반(위증죄)으로 사제직 박탈에 처한다. 구체적으로, 신성한 루시를 위한 기도를 낭독하라는 총대주교의 축복을 이행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10,000명 이상이 그를 지지하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29명의 사제와 12명의 부제를 포함된 명단이 총대주교 키릴에게 보내졌다. 응답은 없었다. 우민스키는 사제직을 박탈당했다. 한 전직 신도는 이렇게 말했다. “알렉세이 사제가 쫓겨났을 때, 내 교회 생활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2024년 2월, 우민스키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으로 이동했다.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가 그를 사제로 다시 받아들였다. 이제 그는 유럽의 한 교구에서 섬긴다.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다. 러시아 정교회를 떠난 것이다.


2024년 : 저항과 순응 사이

2024년 중반까지, 수십 명의 사제가 반전 견해로 억압을 받았다. 일부는 사제직 박탈, 일부는 교구에서 추방, 일부는 단순히 침묵하도록 강요 받았다. 자유주의적 성직자들에게만 위협이 온 것이 아니다. 신도들도 위협을 받았다. 단 한 번의 고발로 직장을 잃거나 자유를 잃을 수 있다. 동시에 다른 흐름도 있다. 2025년 7월의 한 여론조사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다. 젊은 러시아인 중 정교회 신자라고 답한 비율이 2021년 25%에서 2025년 45%로 거의 두 배 증가했다. 청년들이 신앙을 찾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러시아 정교회는 기로에 서 있다. 푸틴과 긴밀하게 결합하면서, 교회는 크렘린의 정치적 국경 안에 갇힐 위험이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독립 정교회가 2018년 모스크바 통제에서 벗어났다. “러시아 정교회는 전 세계적 영향력을 잃고 있다”고 전세계 정교회는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쇄신의 움직임도 조용히, 은밀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개신교를 향한 질문

러시아 정교회의 이 이야기가 한국 개신교에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갔는가? 러시아 정교회가 70년의 박해 후 성경으로 돌아가야 했다면, 한국 교회는 70년의 성장 후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성경을 읽는가, 아니면 성공의 공식을 찾는가? 말씀을 묵상하는가, 아니면 교회 성장 전략을 연구하는가?

멘은 무신론적 지식인들에게 ‘상식에 근거한 신비주의’를 제시했다. 한국 교회는 탈 종교시대의 청년들에게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가? 반지성주의적 열정인가, 아니면 이성과 신앙이 함께 가는 길인가? 우리는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 멘은 KGB의 감시 아래서도 신도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를 알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우민스키는 지적인 청년들이 질문하고 논쟁하며 성장하는 공동체를 구축했다.

한국 교회는 완전한 종교의 자유 속에서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 경쟁하는 소비자들의 모임인가, 아니면 서로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몸인가? 출석률로 측정되는 성공인가, 아니면 삶의 변화로 증명되는 신앙인가?

우리는 권력 앞에서 어떤 목소리를 내는가?

멘은 복음에 야만족이던 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였다. 우민스키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다 사제직을 잃었다. 한국 교회는 권력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축복하는가, 아니면 예언하는가? 순응하는가, 아니면 저항하는가?

가장 아픈 질문은 이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 러시아 정교회는 ‘성스러운 전쟁’을 선포했다. 일제시대와 한국 전쟁 중 한국 교회는 무엇을 선포했는가? 일제 36년과 분단 70년 동안 우리는 평화의 복음을 전했는가, 아니면 이념의 도구가 되었는가? 러시아 정교회의 쇄신은 박해 속에서 태어났다. 멘은 카타콤에서 세례 받았다. 우민스키는 사제직을 잃었다.

한국 교회의 쇄신은 어디서 올 것인가? 성공의 정점에서 올 것인가? 아니면 위기의 순간에 올 것인가? 교회가 사회의 중심에 있을 때인가? 아니면 주변으로 밀려났을 때인가?

한국 교회도 이 사회에서 영향력이 줄어들고, 젊은이들이 떠나고, 세상이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시대에 부딪히고 있다. 어쩌면 이 시대가 위기의 시대가 아니라 기회의 시대일 수 있다. 화려함을 벗고 본질로 돌아가고, 말씀으로, 진정한 공동체로, 이웃을 향한 섬김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지막 장면: 아직 오지 않은 시간

1990년 9월9일, 일요일 아침. 도끼는 한 사람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그가 평생 준비했던 일—지성과 신앙의 만남, 억눌린 이들을 위한 복음, 카타콤에서 시작된 쇄신—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023년1월, 교회법정의 도끼는 한 사람의 사역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구축했던 것—질문하는 청년들, 평화를 갈망하는 신앙,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양심—은 여전히 살아있다.

이 두 도끼로 모두 쇄신은 막을 수 없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땅밑 깊이, 박해 속에서, 침묵 속에서, 눈물 속에서 쇄신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리고 멘 자신이 믿었듯이, 그 씨앗이 가장 풍성하게 열매 맺을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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