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 역사
1653년 2월 어느 날, 모스크바의 한 사제가 떨리는 손으로 총대주교의 편지를 펼쳤다.
“사순절 기도 시 네 번이 아니라 두 번만 절하라.”
그는 편지를 다시 읽었다. 수백 년 동안 그렇게 해 왔던 방식을, 어제까지만 해도 올바른 방식이라 배웠던 것을, 오늘부터는 총대주교 니콘은 틀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더 많은 편지들이 왔다. “알렐루야를 세 번 외치라.” “성상 행렬은 태양을 따라 도는 옛 방식을 버리고, 태양을 거스르는(반시계) 방식으로 바꾸라.” “예수의 철자를 Исусъ(Isus)에서 Іисусъ(Iisus)로 바꾸라.” 그리고 마침내, 가장 충격적인 명령이 왔다.
“두 손가락이 아니라 세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으라.”
그 사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생을 검지와 중지를 펴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모으는 방식이었고, 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배웠던 방식 그리고 성인들이 축복했다고 믿었던 방식이 이제 다 틀렸다고 한다. 총대주교 니콘은 절하는 횟수로 시작된 이 변화들이, 특히 손가락 하나의 차이가, 러시아 정교회를 둘로 찢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수십만 명이 죽음을 선택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3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진정 몰랐던 것이다. 역사는 때때로 지극히 작은 것에서 가장 큰 파국을 만들어낸다. ‘절을 몇 번 하느냐, 손가락을 몇 개 펴느냐’ 이것이 17세기 러시아를 피로 물들인 질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손가락의 개수가 가장 뜨거운 전쟁터가 되었다.
17세기의 격변: 혼란의 시대와 새로운 질서
17세기 초 러시아는 지옥이었다. 1598년 류리크 왕조가 단절되자 러시아는 ‘혼란의 시대’로 빠져들었다. 거짓 차르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폴란드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했고, 스웨덴군이 노브고로드를 삼켰다. 기근이 대지를 휩쓸었고,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차르의 왕좌는 열다섯 해 동안 일곱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1613년, 16세 소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 선출되면서 겨우 질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새 왕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상처는 너무 깊어 러시아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무너졌는가?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약하게 만들었는가?” 많은 이들이 답을 찾았다고 믿었다. 신앙의 타락과 의식의 부패로 인해 하나님께서 러시아를 벌하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신앙을 정화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1652년, 니콘(Nikon, 1605-1681)이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 키가 크고 목소리가 우렁찼으며, 의지가 강철처럼 단단했다.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니콘을 “위대한 주권자”라 부르며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니콘은 국가와 교회를 함께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니콘에게는 더 큰 꿈이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오래된 오류들을 바로잡아 그리스 정교회와 일치시켜 진정으로 러시아를 정교회의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개혁이 러시아를 다시 한번 찢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었다.
개혁의 내용과 갈등의 심화
1653년, 니콘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간단해 보였다. 수 세기 동안 러시아에 스며든 의식들, 비잔틴의 전통들을 그리스 정교회와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니콘은 그리스에서 학자들을 불러왔다. 고대 필사본들을 수집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의식서들을 그리스 정교회 원본과 비교했다. 많은 차이점이 발견되었다.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서신을 보냈다.
첫 번째 편지는 절하는 횟수에 관한 것이었다. 사순절 특정 기도 시 대 배례(земной поклон, 땅에 엎드리는 큰 절)를 네 번이 아니라 두 번만 하라고 했다. 사소해 보였지만, 수백 년의 전통을 한 순간에 바꾸는 것이었다. 이어서 알렐루야를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외치라. 성상 행렬은 태양을 따라 도는 옛 방식을 버리고, 태양을 거스르는(반시계) 방식으로 바꾸라. 예수의 철자를 Исусъ(Isus)에서 Іисусъ(Iisus)로 바꾸라.
하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성호 긋는 방식의 변경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수백 년 동안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어왔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신성과 인성)을 상징했다. 나머지 세 손가락은 모아서 삼위일체를 나타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세 손가락(엄지, 검지, 중지)을 모아 성호를 그었다. 삼위일체를 먼저 상징하고, 나머지 두 손가락을 구부려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나타냈다. 신학적 의미는 비슷했지만, 동작은 완전히 달랐다. 니콘은 러시아도 이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선언했다.
“두 손가락은 이단이다. 세 손가락이 정통이다.”
왜 손가락 문제가 가장 폭발적인 쟁점이 되었는가? 절하는 횟수는 사순절에만 해당되었다. 알렐루야는 특정 기도에만 관련되었다. 하지만 성호는 달랐다. 러시아 정교도는 하루에도 수십 번 성호를 긋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할 때, 교회에 들어갈 때, 식사 전에, 잠들기 전에 언제나 성호를 긋는다.
그리고 손가락의 모양은 즉시 눈에 보였다. 누군가 성호를 긋는 것을 보면, 그가 두 손가락을 쓰는지 세 손가락을 쓰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즉, 누가 ‘옛 신앙’을 지키는지, 누가 ‘새 신앙’을 따르는지 즉시 드러났다. 손가락 하나가 충성의 표시가 되었고, 배신의 증거가 되었다. 더욱이 니콘의 논리는 많은 러시아인들에게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는 러시아의 전통이 비잔틴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고립되면서 오류가 쌓였다고 했다. 따라서 그리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많은 러시아인들에게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3의 로마’인 러시아가 타락한 그리스를 따라야 한다고? 1453년 하나님께 버림받아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된 콘스탄티노플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우리가 정통 신앙의 마지막 수호자라고 믿었는데, 우리가 틀렸다고? 믿을 수 없었다.
아바쿰 페트로프(Avvakum Petrov, 1620-1682)가 외쳤다.
“우리 선조들이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으며 순교했다. 그들이 천국에 가지 못했단 말인가? 그들의 성유골이 기적을 행하지 않았단 말인가? 니콘은 우리에게 조상들을 저주하라고 요구한다!”
갈등은 신학을 넘어 정체성의 문제가 되었다. 두 손가락은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러시아의 독특함이고, 러시아의 성스러움이고 러시아의 정통성이었다. 손가락 하나를 바꾸는 것은 러시아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니콘의 개혁은 러시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당신들이 평생 믿어온 것은 거짓이었다. 당신들의 성인들은 잘못 기도했다. 당신들의 순교자들은 헛되이 죽었다.” 그리고 니콘은 반대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차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반대하는 사제들을 파문했다. 추방했고, 투옥했고, 채찍질했고, 수도원에 유배했다. 1654년, 모스크바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니콘은 개혁을 공식적으로 승인 받으려 했다. 하지만 많은 주교들이 주저했다. 일부는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니콘은 그들을 압박하고 협박했다. 결국 공의회는 개혁을 승인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부터가 아니라 두려움으로 인해 승인했다.
저항은 계속 커졌다. 단순한 사제들뿐 아니라 고위 성직자들도 반대에 가담했다. 수도원들이 개혁을 거부했다. 평신도들이 새로운 책들을 불태웠다. 마을 전체가 옛 신앙을 지키기로 맹세했다. 러시아는 다시 한번 둘로 찢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몽골이 아니라 손가락의 개수가 칼이었다.
구교도들의 저항과 분리: 라스콜의 비극
1666년 대공의회가 열렸다. 니콘 자신은 역설적으로 이미 실각해 있었다. 그는 차르(황제)의 권력보다 사제(교회)의 권력이 더 높다고 까지하며 교만해졌다. 결국 그의 교만과 차르와의 권력 다툼이 몰락을 불렀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여전히 살아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옛 신앙을 고수하는 자들을 파문하고 이단으로 규정했다. '라스콜니키(Raskolniki, 분열자들)'라는 이름을 붙였다. 공의회는 그들을 러시아 정교회에서 영원히 축출했다. 이것이 ‘라스콜(Raskol, 대분열)’이었다.
구교도들(Old Believers, 스타로베르치)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굴복하느냐, 저항하느냐. 세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고 교회에 남느냐, 두 손가락을 지키고 추방 되느냐. 하지만 수만 명이 저항을 택했다. 그들은 타협을 거부하고 감옥에서, 유배지에서, 고문대에서도 설교를 멈추지 않았다. 1682년4월14일, 그들의 중심에 서 있었던 아바쿰과 그의 동료들은 화형 당했다. 그들은 불 속에서도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으며 죽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박해는 순교자들만 만들어냈다. 구교도들은 흩어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러시아의 변방으로 도망쳤다. 시베리아의 타이가로. 북극의 툰드라로. 볼가 강변의 깊은 숲으로, 우랄 산맥 너머로 숨었다. 그들은 비밀 공동체를 만들었다. 숨겨진 예배당에서 옛 방식으로 기도했다. 새로운 책들을 거부하고 손으로 베낀 고대 필사본을 사용했다.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고, 알렐루야를 두 번 외쳤다. 사순절에는 네 번 절했다. 극단적인 경우, 그들은 '집단 자결‘을 택했다. 정부 군대가 그들의 마을을 포위하면, 그들은 교회에 모여 문을 잠그고 최후의 수단으로 불을 질렀다. 수천 명이 이렇게 죽었다. 세 손가락에 굴복하느니 불 속에서 두 손가락을 지키며 죽는 것을 택했다.
1687년, 팔레오스트로프스키(Paleostrovskiy) 수도원에서 2,700명이 집단 분신했다. 1691년, 토볼스크 근처에서 1,500명이 같은 길을 택했다. 17세기 말까지 약 수만 명이 ’불의 세례‘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왜 그랬을까? 손가락의 개수 때문에? 절을 몇 번 하느냐 때문에? 알렐루야를 몇 번 외치느냐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더 깊은 곳에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정체성이었다. 신앙의 순수성이었다. 세상이 타락해도 변하지 않는 진리에 대한 믿음이었다. 구교도들은 자신들이 마지막 진정한 러시아 정교도라고 믿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미 타락했다. 모스크바도 이제 타락했다. 차르는 적그리스도가 되었다.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는 자들만이 진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타협은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세 손가락으로부터 육체를 불사르더라도 영혼은 지켜야 했다. 18-19세기 내내 박해는 계속되었다. 구교도들은 이등 시민이었다. 공직을 가질 수 없었고, 대학에 갈 수도 없었다. 군대에서도 차별받았고 그들의 결혼은 법적으로 인정되지도 않았다. 그들의 자녀는 사생아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버텼다. 역설적으로, 박해가 그들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고립이 그들의 공동체를 더 결속시켰다. 고난이 그들의 신앙을 더 순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상인과 사업가가 되었다. 정부 관료가 될 수 없었기에 장사와 무역에 집중했다. 서로를 신뢰하고 도왔다. 19세기 말, 러시아 상업의 상당 부분이 구교도들의 손에 있었다. 가난한 분열자들이 부유한 상인 계급을 형성한 것이다.
1905년, 니콜라이 2세는 마침내 종교적 관용 칙령을 발표하므로 구교도들은 더 이상 범죄자가 아니었다. 250년의 박해가 공식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분열은 남았다. 오늘날에도 러시아에는 약 100만-200만 명의 구교도가 있다고 한다. 그들은 여전히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는다. 자신들만이 진정한 정통 신앙을 지킨다고 믿는다.
니콘의 개혁은 무엇이었는가? 필요한 현대화였는가, 아니면 불필요한 폭력이었는가? 그리스와의 일치는 정당했는가? 러시아의 독특성을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역사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니콘 자신도 비극적으로 끝났다. 권력에서 쫓겨나 수도원에서 외롭게 죽었다. 그의 개혁은 살아남았지만, 그가 꿈꿨던 통일된 교회는 산산조각 났다.
구교도들이 남긴 교훈은 무엇인가? 아마도 신앙은 단순히 교리가 아니라 정체성이고, 문화이며, 세대를 이어온 기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꾸려 할 때는 설령 선한 의도라 해도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절하는 횟수, 알렐루야의 반복, 손가락의 개수, 얼핏 보면 사소한 차이들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수만 명의 죽음이 250년이나 지속 되었다. 그리고 350년이 지난 지금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있다. 러시아 정교회 역사상 가장 깊은 상처가 손가락 하나의 차이였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러시아 어딘가에서, 여전히 누군가는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