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멍에와 신앙의 뿌리

러시아 정교회 역사

by 이헌철

1237년 겨울, 몽골군이 동유럽의 문턱에 도착했다. 바투 칸이 이끄는 기마병들은 얼어붙은 강을 건너 러시아 땅으로 밀려 들어왔다. 랴잔, 수즈달, 블라디미르—하나씩 도시들이 불에 탔다. 1240년 겨울, 블라디미르가 세례를 받았던 키이우가 포위당했다. 성문이 부서졌고, 키이우는 멸망했다. 전쟁 전 수십만 명이 살던 도시에 불과 2천 명만이 살아남았다.

이것은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고난의 240년은 러시아 정교회를 더 깊고 강하게 만들었다. 몽골의 지배 아래 고통받으면서, 러시아인들은 신앙에서 위안을 찾았다. 수도원은 피난처가 되었고, 기도는 생존의 무기가 되었다. 가장 위대한 러시아 성인들이 이 시대에 탄생했고, 가장 아름다운 이콘들이 이 시대에 그려졌다. 몽골은 러시아의 몸을 짓밟았지만, 러시아의 영혼은 오히려 하늘로 날아올랐다.


억압이 만든 자유

1240년 키이우 함락 이후, 러시아 공국들은 몽골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각 대공들은 먼 몽골의 수도 사라이로 가서 칸 앞에 무릎을 꿇고 통치 허가증을 받아야 했다. 공물은 가혹했다. 매년 은과 금, 모피와 곡식, 그리고 젊은이들을 바쳐야 했다. 공물을 바치지 못하면 마을 전체가 불탔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 억압의 시대에 러시아 정교회는 전례 없는 자유를 누렸다. 몽골인들은 실용주의적 이유로 종교인들의 기도가 자신들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에게는 세금 면제, 군역 면제 등 특권을 부여했다. 1267년, 몽골의 멘구-티무르칸은 정교회에 파격적인 칙령을 발급했다. 교회 재산을 보호하고, 성직자들을 칸의 직접 보호 아래 두며, 교회를 모독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선언했다.

역설적이게도, 몽골의 멍에는 교회에게는 황금 시대였다. 대공들이 칸에게 굴종하는 동안, 교회는 민족의 정신적 중심이 되었다. 주교들은 칸에게 절하지 않았고, 수도원들은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교회만이 러시아인들의 존엄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시기 동안 약 180개의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수도원은 단순히 기도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러시아 문화의 보고였다. 몽골군이 도시들을 불태웠지만, 수도원들은 살아남았다.

고난이 깊게 만든 신앙

왜 신은 러시아를 버렸는가? 이것이 13세기 러시아인들이 던진 절규였다. 러시아 정교회는 이 질문에 독특한 답을 내놓았다. 블라디미르의 세라피온 주교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화하려는 것이다. 금을 불로 정제하듯, 하나님은 고난으로 우리 영혼을 정제하신다.”

이 신학은 십자가 신학으로 발전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난 받았듯이, 러시아도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도승들은 이 고난의 영성을 가장 극단적으로 실천했다.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의 영성이 러시아 수도원주의의 핵심이 되었다. 수도승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싸웠다. 금식, 철야 기도, 육체 노동, 이 모든 고행은 영적 전쟁의 무기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극단적인 금욕이 사람들을 수도원으로 끌어들였다. 농민들은 전쟁과 기근, 전염병과 학살 속에서 살았다. 그들에게 삶 자체가 고난이었다. 그런데 수도원에 가면, 자신의 고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수도승들은 말했다. “당신의 고난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안이었다.


숲에서 피어난 희망

1314년 로스토프 근처에서 태어난 바르톨로메이는 훗날 러시아 정교회의 가장 위대한 성인이 될 소년이었다. 1330년대, 몽골의 세금 징수원들이 그의 가족을 파산시켰다. 부모가 죽은 후, 20세의 바르톨로메이는 형과 함께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마코베츠 산의 숲은 곰과 늑대가 우글거리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작은 나무 교회를 짓고 세르기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숲 속에 성스러운 은둔자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 두 사람씩 세르기를 찾아왔다. 1340년대 중반, 12명의 수도승이 세르기 주위에 모였다. 삼위일체 수도원이 탄생한 것이다.

세르기가 세운 수도원은 기존의 수도원들과 달랐다. 수도승들은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기도했다. 모든 재산은 공동 소유였다. 세르기 자신도 다른 수도승들과 똑같이 일했다. 평등과 검소함이 철칙이었다. 어느 농부가 수도원을 방문해 “세르기 수도원장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수도승들이 채소밭에서 일하는 남루한 노인을 가리켰다. 농부는 웃으며 말했다. “나를 놀리지 마시오. 세르기 수도원장은 위대한 성인인데, 저런 거지 같은 사람일 리 없소.” 바로 그때 화려한 마차를 탄 귀족이 도착해 그 남루한 노인에게 무릎을 꿇었다. 농부는 그제야 깨달았다.

1380년,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몽골의 마마이 칸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드미트리 대공은 세르기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image.png 세르기

세르기는 그에게 축복을 주며 말했다. "가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세르기는 축복뿐만 아니라 자신의 수도원에서 무술 실력이 뛰어난 두 수도승, 페레스베트와 오슬랴뱌를 직접 보내 전투에 참여시켰다고 전해진다. 쿨리코보 평원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해질 무렵 러시아군이 승리했다. 이것은 150년 만에 러시아가 몽골에게 거둔 첫 대승이었다.

세르기는 1392년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을 때, 그의 제자들은 이미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새로운 수도원들을 세우고 있었다. 14-15세기에 약 150개의 새로운 수도원이 세워졌다. 수도승들은 러시아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농민들이 따라갔고, 마을이 생겼으며, 교회가 세워졌다.

우리 시대의 고난과 신앙의 뿌리

몽골의 멍에 아래 살았던 러시아인들의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고난의 본질은 시대를 초월한다. 오늘날 우리는 몽골의 침략을 겪지 않지만,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몽골의 멍에’를 경험한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만성적인 질병-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찾아오는 통증, 나아지지 않는 증상들-일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경제적 어려움-무리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 끝이 보이지 않는 빚-일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관계의 상처-깨어진 가정, 배신당한 신뢰, 치유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일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사회적 부조리-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바꿀 수 없어 보이는 구조적 문제들-일 수 있다.

13세기 러시아인들이 “왜 하나님은 우리를 버렸는가?”라고 절규했듯이, 우리도 고난 앞에서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왜 신은 침묵하시는가? 이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러시아 정교회가 발견한 답은 놀랍다. 고난은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라피온 주교가 말했듯이, 금을 불로 정제하듯 하나님은 고난으로 우리 영혼을 정제하신다. 고난은 벌이 아니라 초대다. 더 깊은 신앙으로, 더 진실한 자아로, 더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가라는 초대이다.

세르기가 숲 속에서 혼자 기도할 때,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재산도, 명예도, 안전도 없었다. 곰과 늑대가 우글거리는 숲에서 추위와 굶주림과 싸웠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 운동이 시작되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것이 자랐다. 가장 비어 있는 곳에서 가장 풍성한 것이 넘쳤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낄 때,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 바로 그때가 신앙의 뿌리가 가장 깊이 내릴 수 있는 순간이다. 몽골의 멍에 아래서 러시아인들이 발견했듯이, 외적 억압은 내적 자유를 막을 수 없다. 칸에게 굴종하는 대공들보다 숲 속에서 홀로 기도하는 수도승이 더 자유로웠다.

오늘날 우리도 선택할 수 있다. 우리의 고난을 의미 없는 불행으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통해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갈 것인가. 우리의 상처를 원망의 이유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의 약함을 숨길 것인가, 아니면 그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도록 할 것인가.

몽골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콘들이 그려지고, 가장 위대한 성인들이 탄생했다. 가장 어두운 시대가 가장 밝은 영성의 시대가 되었다. 이것은 고난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난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힘들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가 보여준 것은, 고난이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십자가 다음에는 항상 부활이 온다.


고난의 의미, 그리고 희망

1480년 몽골의 멍에가 끝났을 때, 러시아는 정치적으로 독립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사실이었다. 240년의 고난은 러시아 정교회를 단순히 비잔틴의 모방이 아니라,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고난 속에서 단련된, 십자가의 신학으로 무장한 독립적인 교회로 만들었다. 14세기 러시아의 한 연대기 작가는 이렇게 썼다. “타타르인들이 우리의 도시들을 불태웠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교회를 불태울 수 없었다. 타타르인들이 우리의 몸을 사슬로 묶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영혼을 묶을 수 없었다. 우리는 육체로는 노예였지만, 영혼으로는 자유로웠다.”

고난은 신앙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은 신앙을 깊게 만든다. 억압은 교회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억압은 교회를 강화한다. 이것이 몽골의 멍에 아래 240년을 살았던 러시아인들과 숲 속에서 홀로 기도했던 세르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당신의 고난이 무엇이든, 그것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신앙으로 가는 문이다. 당신이 지금 겪는 십자가가 무겁게 느껴지더라도, 그 십자가 너머에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 몽골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듯이, 당신의 고난 속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믿음이 자랄 수 있다. 이것이 몽골의 멍에가 러시아 정교회에,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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