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대제의 칼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

by 이헌철
image.png 표트르 대제 Ⓒwikipedia


1700년 10월, 모스크바 총대주교 아드리안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임종을 지켜본 이들은 곧 새로운 총대주교가 선출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표트르 1세는 총대주교 대리로 스테판 야보르스키(Stefan Yavorsky)를 임명해 명맥만 20년을 유지시키다가, 1721년 종무원 설립과 함께 아예 직제 자체를 없애버렸습니다. 이는 정교회 전통인 '교회와 국가의 협치(Symphonia)'를 정면으로 거부한 사건이었다. 차르는 의도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심장부가 서서히 멈추도록 기다렸다.

image.png 서구의 조선술을 배우고 있는 표트르. http://pro100-mica.livejournal.com/80052.html#comments / From ru:

표트르가 바라본 것은 서유럽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배를 만들고, 영국에서 조선술을 배우며, 그는 러시아의 낙후함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교회가 그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다. 총대주교 아드리안은 생전에 표트르의 서구화 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했다. 귀족들에게 수염을 자르라고 하고, 서양식 의복을 입도록 하고, 전통적인 러시아의 관습의 포기를 ’신앙에 대한 모독‘이라 했다.

표트르는 총대주교가 얼마나 큰 정치적 힘을 휘둘렀는지를 기억했다. 교회가 차르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적 기반이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1721년1월25일, 표트르는 마침내 칼을 휘둘렀다.


종무원의 설립

그것은 바로 종무원(Святейший Правительствующий Синод, Holy Synod)의 설립이었다. 단순한 행정 개편이 아니었다. 천 년 러시아 정교회 역사와의 단절이었다. 총대주교라는 단일 영적 지도자 대신, 국가가 임명한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교회를"관리"하게 되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위원회의 수장이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 관료라는 점이었다. 차르가 임명한 ‘수석검찰관(Chief Procurator)’은 투표권은 없었지만 모든 교회의 결정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므로 실질적으로 러시아 정교회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종무원의 정관 서문은 냉혹했다. “단일 지도자 체제는 국가에 위험하다. 백성들은 총대주교를 제2의 군주, 심지어 차르보다 더 강력한 권력자로 여길 수 있다.”

표트르는 교회를 국가 기구의 한 부서로 만들었다. 농무부, 상무부가 있듯이, 이제 교회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가 생긴 것이다. 주교들은 더 이상 영적 지도자가 아니라 '종교 업무 담당 공무원'이 되었다. 그들의 임명도, 승진도, 좌천도 모두 차르의 뜻에 달려 있었다. 저항은 미미했다. 아니, 저항할 수 없었다. 표트르의 개혁에 반대 목소리를 낸 주교들은 시베리아의 수도원으로 유배되거나 더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교회는 200년 넘게 이 굴욕적인 체제 아래 살아야 했다.

서구화의 폭력

표트르의 칼은 제도만 베어낸 것이 아니었다. 1698년 8월 외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표트르는 크렘린 궁전 앞마당에서 직접 가위를 들었다. 그를 맞이하러 온 귀족들과 고위 관료들의 수염을 하나하나 잘라냈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수염은 단순한 패션이 아니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키는 신앙의 표지였다. 수염 없는 남자는 서구의 타락한 이단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정교회의 가르침이었다.

표트르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여러분의 머리는 자르지 않겠소. 수염만 가져가겠소.” 이것은 협박이었다.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수염세가 부과되었다. 수염세는 신분에 따라 차등 부과되었습니다. 귀족과 고위 관료는 연간 60~100루블, 상인은 등급에 따라 60루블~100루블, 서민은 30루블 정도였습니다. 당시 100루블은 하급 관료의 수년 치 연봉에 해당할 만큼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수염을 지키려는 자는 경제적으로 파멸하거나, 항구적으로 사회에서 배제되었다. 교회는 항의했지만 무력했다. 이미 총대주교는 없었고, 남은 주교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image.png 남자들의 수염을 깍고 있는 표트르. http://allegro.pl/reforma-obyczajowa-rosja-bojar-drzeworyt-189


전통 의상도 금지되었다. 길게 늘어지는 러시아식 카프탄 대신 서양식 짧은 코트를 입어야 했다. 도시 입구에는 검문소가 세워졌고,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은 강제로 옷의 아랫단을 잘렸다. 무릎까지 끌리는 옷을 입고 들어온 사람은 무릎 위로 잘린 옷을 입고 나가야 했다. 공개적인 수치였다. 성상(이콘)을 그리는 전통 방식도 공격받았다. 표트르는 서구식 원근법과 사실주의 회화 기법을 도입하라고 명령했다. 천년을 이어온 비잔틴 양식의 평면적이고 상징적인 이콘 화법은 ‘후진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많은 이콘 화가들이 새로운 기법을 배우기를 거부하다가 생계를 잃었다.

더 폭력적인 것은 수도원 개혁이었다. 표트르는 수도원을 ‘게으름뱅이들의 소굴’로 보았다. 1724년 칙령으로 수도원 신설은 금지되었고, 기존 수도원의 수도사 수는 강제로 제한되었다. 젊은 남성의 수도원 입회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국가는 군인이 필요하지,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다”라는 것이 표트르의 논리였다. 수도원의 방대한 토지와 재산은 국가가 관리하게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효율적 운영”을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몰수나 다름 없었다. 수도원들은 국가가 정해준 예산으로 운영되어야 했고, 그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다. 많은 수도원이 파산 직전에 내몰렸다.

가장 상징적인 폭력은 수도 이전이었다. 1712년, 표트르는 러시아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천 년 동안 러시아 정교회의 심장이었던 모스크바, 성 바실리 대성당과 크렘린 성당들이 있는 그곳을 버린 것이다. 새 수도는 늪지대 위에 세워졌다. 수만 명의 농노들이 건설 과정에서 죽어갔다. 그곳에는 성스러운 전통도, 순교자의 유해도, 천 년의 기도도 없었다. 오직 차르의 의지만이 있었다. 표트르는 의도적으로 교회의 영적 권위를 해체하고 있었다. 전통을 지우고, 성스러움을 세속화하고, 신앙을 국가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만들었다.


교회, 국가의 시녀가 되다

1722년, 종무원은 첫 번째 중대한 명령을 결정했다. 모든 사제는 고해성사에서 들은 내용 중 ‘국가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을 당국에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회의 영혼을 죽이는 명령이었다. 고해성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신성한 영역이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제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선언하는 비밀스러운 순간이다. 이 비밀성은 절대적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도, 비잔틴 제국에서도, 어떤 권력도 고해성사의 비밀을 침해할 수 없었다. 표트르의 러시아에서 사제는 첩자가 되어야 했다. 누군가 고해소에서 “차르의 정책이 불의하다”고 말하면, 사제는 보고해야 했다. “세금이 너무 무겁다”는 푸념도, “전쟁이 정당하지 않다”는 의심도, 모두 보고 대상이었다. 보고하지 않은 사제는 공범으로 처벌받았다.

신자들은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할 수 없었다. 고해소는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라 감시의 도구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고해성사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영적 공동체가 아니라 국가 통제의 연장선이 되었다. 종무원의 주교들은 차르의 명령을 설교단에서 선포했다. 전쟁이 선포되면 주교들은 “하나님께서 차르의 정의로운 전쟁을 축복하신다”고 설교했다.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면 “세속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가르쳤다. 징병제가 강화되면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영적 순교”라고 미화했다. 교회는 국가의 대변인이 되었다. 모든 주요 정책 발표는 성당에서 낭독되었다. 사제들은 차르의 칙령을 읽어주는 공무원이 되었다. 예배는 국가 선전의 시간이 되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신학적 정당화였다. 종무원 소속 신학자들은 표트르의 전제정치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개발했다. 테오판 프로코포비치 주교는 저서 『군주의 권리와 의지에 관하여』(1722)와 『왕권과 명예에 관한 설교』(1718)에서 차르의 절대 권력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했다. “차르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다. 차르의 권력은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나온다. 따라서 차르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비잔틴의 ‘교황-황제론(Caesaropapism)’도 아니었다. 비잔틴에서는 황제와 총대주교가 긴장 관계 속에서도 상호 견제했다. 하지만 표트르의 러시아에서 교회는 완전히 종속되었다. 차르가 동시에 교회의 머리였다. 영국 국교회에서 국왕이 ‘Supreme Governor’인 것처럼, 러시아 차르는 실질적으로 교회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예배 의식조차 국가 권력을 찬양하는 도구가 되었다. 매 주일 예배 때마다 차르와 황실을 위한 특별 기도가 추가되었다. 차르의 생일, 즉위일, 군사적 승리일은 모두 교회 축일로 지정되었다. 성인들의 축일보다 차르의 기념일이 더 성대하게 기념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1725년 표트르가 죽었을 때, 러시아 정교회는 외형적으로는 여전히 거대했다. 수만 개의 교회, 수천 명의 사제, 수백 개의 수도원이 존재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텅 비어 있었다.

교회는 이제 차르의 가장 순종적인 시녀였다. 차르가 동쪽을 가리키면 동쪽이 거룩한 방향이 되었고, 서쪽을 가리키면 서쪽이 하나님의 뜻이 되었다. 교회는 비판할 수 없었고, 저항할 수 없었고, 심지어 침묵할 수도 없었다. 국가가 요구할 때마다 교회는 축복을 선포해야 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공장이 되었다. 예언자적 목소리는 관료적 보고서로 대체되었다. 영적 권위는 행정 명령에 종속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칼은 한 사람의 목을 친 것이 아니었다. 제도의 영혼을 베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1917년 혁명이 교회를 완전히 파괴할 때까지, 아니 어쩌면 그 이후로도, 결코 치유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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