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의 19세기 황금기

러시아 정교회 역사

by 이헌철

표트르 대제의 칼이 교회의 제도를 베어낸 지 한 세기가 흐른1800년대 초, 러시아는 역설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종무원 체제 아래서 교회는 국가의 시녀였다. 주교들은 차르가 임명한 관료였고, 사제들은 고해성사의 비밀마저 당국에 보고해야 했다. 교회는 여전히 화려했지만, 그 안의 영혼은 텅 비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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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무릎 꿇었지만, 영성으로서의 정교회는 부활했다. 크렘린의 황금 돔 아래가 아니라 깊은 숲 속 수도원에서, 화려한 신학 논문이 아니라 한 노인의 잔잔한 조언 속에서,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 작가의 고뇌 어린 소설 속에서, 러시아 정교회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19세기는 러시아 정교회 역사상 가장 역설적인 시기였다. 제도적으로는 가장 굴욕적이었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풍요로웠다. 정치적으로는 가장 무력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가장 강력했다. 그것은 칼에 베인 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처럼, 고난이 깊게 만든 신앙의 이야기였다.


옵티나 수도원과 장로 전통: 침묵이 말하다

1829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남서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깊은 숲 속, 옵티나 푸스틴(Optina Pustyn, ‘사막의 옵티나’) 수도원에 한 노인이 도착했다. 레오니드 장로(스타레츠 레오니드, 1768-1841)였다. 그는 이미 발다이 수도원에서 수십 년간 수련을 쌓은 고령의 수도사였지만, 당국과의 마찰로 여러 수도원을 전전하다 이곳에 왔다. 그의 도착은 러시아 영성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레오니드 장로는 새로운 것을 가져온 게 아니었다. 그는 거의 사라져가던 옛 것을 회복했다. 장로 전통(старчество, 스타체스보) 이었다. 이것은 4세기 이집트 사막의 교부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었다. 젊은 수도사가 경험 많은 영적 아버지(abba, 아빠) 밑에서 배우고, 자신의 모든 생각과 욕망을 고백하며, 순종과 기도 속에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전통이었다.

하지만 레오니드가 회복한 것은 단순히 수도원 내부의 교육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수도원 밖의 평신도들에게도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변 마을의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삶의 고민과 가족 문제, 질병의 두려움을 가지고 왔다. 레오니드는 긴 설교를 하지 않았다. 그는 듣고, 질문하고, 짧게 조언했다. 때로는 침묵했다. 그 침묵이 어떤 설교보다 깊었다. 장로는 사람들의 죄를 단죄하는 판사가 아니라, 함께 울어주는 의사였다.

소문이 퍼졌다. 도시의 지식인들이, 귀족들이, 심지어 작가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옵티나 숲속에서 신학 교수들이 주지 못한 답을 찾았다. 장로는 그들의 철학적 질문을 듣고 나서, 한마디로 대답했다. “먼저 기도하십시오.” 혹은 “당신의 교만을 버리십시오.” 혹은 그저 “기다리십시오.”

레오니드 이후 암브로시 장로(1812-1891)가 등장했다. 그는 더 놀라운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세속적인 삶을 살다가 중병에 걸린 후 수도원에 들어온 그는 40년 넘게 병약한 몸으로 하루 12시간씩 사람들을 만났다. 1877년 러시아-터키 전쟁 때는 하루 수천 명이 찾아왔다고 한다. 전쟁터로 떠나는 아들을 둔 어머니들, 남편을 잃은 과부들,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지식인들이 찾아왔다. 암브로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절망하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그리고 항상 기뻐하십시오(Не унывать, не смущаться и не отчаиваться).” 이 단순한 말이 19세기 러시아인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화려한 신학 용어도, 복잡한 교리 설명도 아니었다. 그저 한 노인의 잔잔한 목소리였다. “절망하지 마세요.”

옵티나는 19세기 러시아 영성의 심장이 되었다. 1820년대부터1917년 혁명 직전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이곳은 러시아인들의 순례지였다. 크렘린도 아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화려한 대성당도 아니고, 깊은 숲 속 작은 수도원, 거기서 러시아 정교회의 진짜 심장이 뛰고 있었다. 장로들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화려한 설교를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 진심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 경청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표트르가 총대주교를 폐지하고 교회를 관료화했을 때 그는 영적 권위를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적 권위는 제도가 아니라 인격에서 나왔다. 크렘린의 종무원 수석검찰관이 아니라, 옵티나 숲속의 병든 노인이 진짜 목자였다.


문학 거장들과 러시아 정교회

도스트예프스키: 고뇌하는 신앙의 대가

1878년 6월 한 남자가 옵티나로 향하는 먼지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이미 러시아 최고의 작가였지만, 그날 그는 무너진 아버지였다. 나흘 전 그의 세 살 난 아들 알렉세이가 간질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는 그의 삶 자체가 러시아 정교회 영성의 드라마였다. 1849년, 28세의 젊은 작가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회주의 서클에 가담했다는 죄목이었다. 12월22일 새벽,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묘놉스키 광장에서 총살 집행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가 서 있던 말뚝 앞으로 병사들이 총을 겨눴다. 북소리가 울렸다. 10초, 9초, 8초...

image.png 도스토옙스키©wikipedia




갑자기 황제의 사면령이 도착했다. 그것은 니콜라이 1세가 계획한 잔혹한 연극이었다. 처음부터 사형을 집행할 생각은 없었지만,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쓰러졌다. 그는 후에 말했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그날 이후의 내 삶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4년간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에서 중노동을 한 후, 5년간 강제로 군복무를 해야 했다. 총 10년 가까운 시베리아 생활이었다. 옴스크 감옥의 죄수 수용소에서, 그는 단 한 권의 책만 가질 수 있었다. 성경이었다. 그는 그 책을 수십 번 읽었다. 특히 신약의 사복음서를 읽었다. 그곳에서 그는 러시아 민중의 신앙을 목격했다. 교양도 없고, 신학도 모르지만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앙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싸웠다. 『악령』에서 그는 신 없는 세상의 광기를 그렸다. 『죄와 벌』에서는 이성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려는 라스콜니코프가 결국 소냐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 꿇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1880년, 그의 마지막 걸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소설에는 두 개의 핵심이 있다.

하나는 조시마 장로다. 암브로시 장로에게서 영감을 받은 이 인물은 러시아 문학사상 가장 깊이 있는 영적 스승이다. 그는 긴 설교를 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받는 어머니 앞에 땅에 엎드려 절한다. “당신의 아픔은 거룩합니다.” 그는 가르치지 않고 사랑한다. 그의 마지막 말들은 정교회 영성의 정수다. “모든 것에 책임을 지십시오. 심지어 당신이 관련 없는 일에도 그렇게 할 때 당신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대심문관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이다. 16세기 세비야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난다. 그런데 교회의 대심문관이 그를 체포한다. 지하 감옥에서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에게 말한다.

“당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소.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견딜 수 없소. 그들은 빵과 기적과 권위를 원하오. 우리 교회는 당신의 자유 대신 그들에게 안전을 주었소. 당신이 다시 온다면 당신은 우리의 일을 망칠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당신을 내일 화형 시킬 것이오.”

그리스도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침묵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노인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다. 그는 조시마 장로를 통해 정교회 영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동시에 대심문관을 통해 제도화된 교회의 타락을 폭로한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가 국가의 시녀가 된 현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제도 너머에 진정한 그리스도교 영성이 살아있다고 믿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81년 1월28일 세상을 떠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체가 애도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3만 여명이 모였다. 가난한 학생들, 귀족들, 농민들, 모두가 모여 러시아 정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를 애도했다.


톨스토이: 진리를 향한 고독한 반역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1879년, 51세의 톨스토이는 영적 위기에 빠졌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야스나야 폴랴나의 광대한 영지, 사랑하는 가족, 무한한 명성. 그러나 그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참회록』(1882)에서 그는 적나라하게 고백한다. “내 삶은 어리석고 의미 없는 농담이었다. 왜 사는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나는데?” 그는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총을 숨겼고, 목맬 밧줄을 치웠다.

image.png 톨스토이Ⓒwikipedia

그는 답을 찾기 위해 정교회로 돌아갔다. 교회에 출석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려 했다. 하지만 곧 환멸을 느꼈다. 성찬례를 보며 그는 생각했다.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이것은 마술이 아닌가?” 성상 앞에서 절하는 사람들을 보며 분노했다.

“우상 숭배가 아닌가?” 톨스토이는 신약성경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예수의 진짜 가르침은 산상수훈에서와 같이 단순하다. “원수를 사랑하라. 폭력에 저항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라.” 이것이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교회가 만들어낸 미신과 권력의 도구다.

1880년대부터 그는 자신만의 그리스도교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처음에는 무시했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영향력은 너무 컸다. 러시아 전역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톨스토이주의자(Tolstoyans)”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육식을 거부하고, 폭력을 거부하고, 국가와 교회의 권위를 거부했다.

1901년 2월20일 종무원은 결단을 내렸다. 레프 톨스토이의 파문을 공식으로 선언했다(뒤쪽의 출교 선언문 참조). ‘하나님께서 주신 작가적 재능을 이단을 전파하는데 사용했다. 삼위일체를 의심하고 성찬례를 부정하고, 성인들을 조롱하고, 교회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종무원에 대한 답변에서 대답했다. ‘나는 정말로 정교회 교리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교회가 나를 배척했지만,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교회를 떠났다.’

파문은 러시아 사회에 충격파를 일으켰다. 지식인 사회는 분노했다. 막심 고리키는 썼다. “교회는 톨스토이를 파문했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교회를 파문한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톨스토이 편에 섰다. 황제가 지배하는 교회가 도덕적 양심의 상징을 단죄하는 아이러니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마지막까지 일관되었다. 1910년11월, 82세의 노인은 집을 떠났다. 아내의 물질주의와, 가족의 위선과, 자신의 부유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작은 기차역 아스타포보에서 폐렴에 걸렸다. 11월7일, 그는 그곳에서 마지막까지 사제의 방문을 거부하며 죽었다.

두 거장, 두 가지 길. 도스토옙스키는 정교회 안에 머물며 그 깊이를 탐구하고 그 모순을 폭로했다. 톨스토이는 정교회를 떠나며 제도의 위선을 고발하고 복음의 순수함을 추구했다.

이 두 사람은 19세기 러시아 정교회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복잡하고, 모순적이었는지 보여준다. 교회는 국가의 시녀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위대한 영혼들이 하나님을 찾고, 진리를 추구하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었다.



참조 문서: 러시아 정교회 최고회의 톨스토이 출교 선언문(1901.2.24.)

러시아 정교회 최고회의는 정교회 구성원들을 돌보고, 그들을 미혹된 자들의 해로운 유혹으로부터 보호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레프 톨스토이 백작과 그의 반기독교적이고 반교회적인 거짓 교리에 대해 판단을 내렸으며, 교회의 평화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다음의 메시지를'교회 공보'에 게재하는 것이 적시라고 인정하였다.

지극히 거룩한 전 러시아 정교회 최고회의가 정교회 신자들에게 주님 안에서 기쁨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를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로마서16:17)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교회는 수많은 이단자들과 거짓 교사들의 모독과 공격을 견뎌왔으며, 그들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확립된 교회의 본질적 기초를 전복시키고 흔들려고 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대로, 지옥의 모든 권세도 거룩한 교회를 이기지 못했으며, 교회는 영원히 정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허락 아래, 새로운 거짓 교사 레프 톨스토이 백작이 나타났다.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세례와 양육으로 정교회 신자였던 그는, 그의 교만한 마음에 유혹되어, 주님과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재산을 거부하고 반역했으며, 모든 사람 앞에서 분명히 자신을 정교회 신자로 양육하고 키워준 어머니 교회를 버렸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문학적 재능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반하는 가르침을 사람들 사이에 퍼뜨리는 데 바쳤으며, 우주를 세운 조상들의 믿음인 정교 신앙, 우리의 선조들이 살고 경외했으며 지금까지 거룩한 러시아가 굳건히 지켜온 신앙을,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서 파괴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저술과 편지에서, 그와 그의 제자들이 전 세계, 특히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전역에 퍼뜨린 수많은 글에서, 광신자의 열정으로 정교회의 모든 교리와 기독교 신앙의 본질 자체를 전복시키려 설교한다:

그는 삼위일체로 영광 받으시는 인격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 우주의 창조주이자 섭리자를 거부한다

인류를 위해 고난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인간이자 세상의 구속자이자 구세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

그리스도 주님의 무죄한 잉태와 가장 순결하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영원한 동정녀 마리아의 출산 전후 동정성을 부인한다

내세와 천국의 보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의 모든[성사]와 그 안에서의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 찬 활동을 거부한다

정교회 신자들의 가장 거룩한 신앙의 대상들을 저주하며, 가장 위대한[성사]인 거룩한 성찬례를 조롱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레프 톨스토이 백작은 이 모든 것을 말과 글로 끊임없이 설교하여, 전체 정교회 세계를 유혹하고 공포에 떨게 하며, 이렇게 위장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의식적으로 그리고 고의적으로 정교회와의 모든 교제에서 자신을 단절시켰다.

그의 이성에 호소하려는 시도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따라서 교회는 그를 구성원으로 여기지 않으며, 그가 회개하고 교회와의 교제를 회복할 때까지 그를 포함시킬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의인들을 확증하고 방황하는 자들을 훈계하기 위해, 특히 레프 톨스토이 백작 자신을 새롭게 훈계하기 위해 전체 교회 앞에서 이를 증언한다.

신앙을 지키는 그의 많은 이웃들은, 그가 인생의 마지막 날들에 하나님과 우리 주 구세주에 대한 믿음 없이 남아 있으며, 교회의 축복과 기도로부터, 그리고 교회와의 모든 교제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것을 슬픔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의 교회로부터의 이탈을 증언하면서, 우리는 함께 주님께서 그에게 회개와 진리의 이해를 허락하시기를 기도한다(디모데후서2:25).

우리는 당신께 기도하나이다, 자비로우신 주님, 죄인의 죽음조차 바라지 않으시는 주님, 들으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그를 당신의 거룩한 교회로 돌이키소서.

아멘.

진정으로 서명함:

겸손한 안토니,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라도가의 대주교

겸손한 테오그노스트,

키예프와 갈리시아의 대주교

겸손한 블라디미르,

모스크바와 콜롬나의 대주교

겸손한 제롬,

홀름스크와 바르샤바의 대주교

겸손한 야곱,

키시나우와 호틴의 주교

겸손한 마르켈라, 주교

겸손한 보리스, 주교

출처: 교회 공보(Church Gazette), 제8호, 1901년2월24일, 45-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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