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십자가:
소비에트에서의 순교

러시아 정교회 역사

by 이헌철
image.png 티혼 총대주교

1917년10월25일 밤, 겨울궁전의 창문들이 깨졌다. 붉은 깃발을 든 자들이 거리를 장악했다. 레닌은 연단에 올라 외쳤다.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 승리했다!”

그날 밤, 러시아 정교회는 자신들의 세계가 끝났다는 것을 몰랐다. 천 년 동안 러시아 정교회는 드니프로 강에서 블라디미르가 세례를 받은 이후, 러시아 그 자체였다. 몽골의 침략도, 나폴레옹의 대군도 이 신앙을 꺾지 못했다. 니콘의 개혁은 교회를 분열시켰지만 파괴하지는 못했다. 표트르 대제의 칼도 제도를 굴복시켰지만 신앙을 지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1917년은 달랐다. 이것은 단순한 권력 교체가 아니었다.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종교는 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니, 신을 적으로 규정했다. 마르크스는 말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레닌은 더 노골적이었다. “신에 대한 모든 관념, 신과의 어떤 타협도 가장 위험한 독소다.” 트로츠키는 외쳤다. “우리의 과업은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 낙원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낙원에 신의 자리는 없다.”

1917년 11월 혁명 정부는 첫 번째 칙령인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발표했다. 듣기에는 근대적이고 진보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내용은 달랐다. 교회는 더 이상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고, 학교를 운영할 수 없었다. 병원을 세울 수도 없었다. 심지어 출생, 결혼, 사망 등록도 할 수 없었다.

한 세기 동안 정교회가 운영해온 교구 학교 37,000개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았다. 4개의 정교회 대학, 57개의 신학교가 폐쇄되었다. 종교 교육은 범죄가 되었다. 부모가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조차 불법이었다. 1918년1월19일(구력), 총대주교 티혼(Tikhon)이 이런 상황 앞에서 교회의 입장을 발표했다. 그는 아나테마(파문)을 선언했다. 러시아 정교회 역사상 가장 용감한 문서 중 하나였다.

"권력을 찬탈한 자들이여, 너희는 신성한 것을 모독하고 있다. 교회의 재산을 약탈하고 있다. 성직자를 살해하고 있다. 너희가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너희를 기다릴 것이다. 나는 총대주교로서 너희를 교회에서 파문한다."

이것은 선전포고였다. 그때부터 교회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교회의 재산 몰수와 성직자 처형

1918년 여름, 적군(赤軍)이 모스크바를 완전히 장악했다. 첫 번째 표적은 크렘린 안의 성당들이었다. 병사들이 돌격해 들어갔다. 성상들이 총검에 찢기고, 성배들이 약탈당했다. 제단 위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한 장교는 주교의 관을 쓰고 춤을 췄다.

페트로그라드의 메트로폴리탄 베냐민 주교(Metropolitan Benjamin of Petrograd)가 1922년 8월 체포되었다. 죄목은 “교회 재산 은닉”이었다. 재판은 희극이었다. 판사들은 처음부터 판결을 내려놓고 있었다. 벤야민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저는 그리스도의 양들을 지키려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8월13일 밤, 그는 총살당했다. 그의 시신은 집단 무덤에 던져졌다.

학살의 통계는 소름이 돋게 한다. 1917년부터 1923년 사이(정확한 수치는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최소한의 추정치조차 끔찍하다:

“주교28명 처형, 사제1,215명 처형, 수사와 수녀3,000명 이상 살해, 평신도 수만 명 학살”

솔로베츠키(Solovki) 수도원. 백해(White Sea)의 섬에 있는 이 수도원은 15세기부터 러시아 정교회의 영적 중심지 중 하나였다. 1923년 볼셰비키는 이곳을 굴라그(강제노동수용소)로 바꿨다. 수백 명의 성직자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나무를 베어야 했고, 하루에 정해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식량 배급이 줄었다. 겨울 기온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갔다. 적절한 의복도, 난방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얼어 죽었다.

1929년, 한 무리의 사제들이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 간수들은 그들을 모스키토 섬으로 보냈다. 그곳은 모기 떼가 극성을 부리는 늪지대였다. 사제들은 벗겨진 채로 섬에 버려졌다. 3일 후 그들을 데리러 갔을 때, 대부분이 미쳐 있었다. 모기에 물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몇몇은 자신의 살을 긁어 뜯어 뼈가 보였다.

1937-1938년, 대숙청 시기에 스탈린은 교회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명령했다. 단 2년 동안 성직자 및 종교 관련 인사 136,900명 중136,000명 이상 체포하고, 활동 중인 교회 29,584개가 1,024개로 감소했다. 1917년 117,915명이었던 사제와 수사의 수가 1941년에는5,665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조직적 대 학살이었다.

지하교회와 침묵의 증언

하지만 교회는 죽지 않았다. 성당들이 폭파되었지만, 기도는 계속되었다. 사제들이 총살되었지만, 세례는 계속되었다. 성경이 불태워졌지만, 믿음은 전승되었다. 지하교회(Catacomb Church)가 탄생했다. 1920년대 말, 수천 개의 비밀 공동체가 소련 전역에 형성되었다. 그들은 아파트에서, 숲 속에서 모였고 지하실에서 모였다. 새벽4시에, 한밤중에,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모였다.

마리야 스크보르초바 수녀(Mother Maria Skobtsova)는 혁명 후 파리로 망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저항의 다른 형태를 선택한 것이었다. 파리에서 그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집을 열었다. 러시아 망명객들을 돌봤다. 그리고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그녀는 유대인들을 숨겨줬다. 1943년,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그녀를 체포했다. 그녀는 라벤스브뤽 수용소로 보내졌다. 1945년3월31일, 부활절을 며칠 앞두고, 그녀는 가스실로 끌려갔다. 목격자들은 말하기를 그녀가 어린 자녀가 있는 다른 여성을 밀어내고 그녀가 줄을 대신 섰다고 증언한다. 가스실 문이 닫히기 전, 그녀는 성호를 긋고 당당히 들어갔다고 전한다.

1920년대 말 타티아나 그리고리예바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모스크바의 한 공장에서 일했다. 당 간부들은 그녀의 신앙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모범 노동자였기 때문에 눈감아줬다. 어느 날 밤, 한 젊은 여성이 그녀의 문을 두드렸다. "제 아이에게 세례를 주실 수 있나요?" 타티아나는 위험을 알았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주방 싱크대에 물을 채웠다. 아기를 안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기도했다. “하나님의 종○○○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물을 아기의 머리에 세 번 적셨다. 어머니는 울었다. 타티아나도 울었다. 이런 일이 위험하지만 은밀하게 멈추지 않고 수천 번 일어났다.

지하교회의 순교자들은 화려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은 신문에 나지 않았고, 국가의 기념비도 없다. 많은 이들의 무덤조차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이겼다. 공산주의는 교회당을 파괴 했고 폭파했다. 사제를 살해하고, 성경을 불태웠다. 어린이들에게 “신은 없다”고 가르쳤다. 7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신론 국가가 신앙을 근절하려 했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붕괴했을 때, 교회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지하실에서, 숲 속에서,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침묵 속에서 신앙은 살아남았다. 할머니들이 손녀에게 기도를 가르쳤고, 어머니들이 몰래 자녀에게 세례를 주었다. 사제들이 목숨을 걸고 미사를 드렸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돌아온 후 말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빵만 있고 의미가 없는 삶은 죽음보다 못하다. 나는 수용소에서 그것을 배웠다. 빵도 없고 자유도 없을 때, 유일하게 남는 것은 신앙이다. 그리고 그 신앙이 나를 살렸다."

지하교회의 순교자들은 승리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들은 소련의 붕괴를 보지 못했고, 교회들이 재건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믿음의 씨앗을 심고, 피로 물을 주었다. 그리고 그 씨앗에서 새로운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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